김혜진『어비』- 21세기, 노동하는 가장자리의 사람들
김혜진, 『어비』, 민음사, 2016
목차
- 어비
- 아웃포커스
- 한밤의 산행
- 치킨 런
- 쿵후하는 자세
- 광장 근처
- 줄넘기
- 와와의 문
- 비눗방울맨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별풍선을 선물할 생각은 안 했다. 이런 건 일이 아니고 이런 식으로 돈을 버는 건 반칙이고. 그보다 내가 아는 어비는 이런 걸로 뭘 해 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비는 열심히 일할 줄 알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 아닌가. (24-25, 어비)
그러니까 거긴 처음부터 엄마의 자리 같았다. 회사의 중심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리. 그래서 누군가 툭 치면 단 몇 걸음 만에 회사를 벗어나게 될지도 몰랐다. 문득 저 시커먼 창 너머로 사람들이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려다보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자리를 지키려고 어쨌든 엄마는 계속 땀을 흘리고 있었다. (60, 아웃포커스)
이사를 간다는 예고도, 헤어지자는 선포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보다 더 ‘이렇게 살기 싫다’는 고백에 맥이 빠졌다. 그녀는 늘 내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안도감 같은 걸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함께 질주하던 그 많은 순간들을 어쩌면 그녀는 견디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젠 이곳을 떠나 다른 세계로 또각또각 걸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8차선 도로를 차분히 건너던 그 밤처럼 선미는 이제 안전이 보장된 인도 쪽으로 완전히 옮겨 가려 하고 있었다. (99, 치킨 런)
학생 아닌가?
감독관이 묻는다.
졸업했어요.
그가 답한다.
그럼 일을 해야지.
감독관이 꾸짖는다.
일하는데요,
그가 항변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진짜 일을 해야지. (151-152, 광장 근처)
그는 미안하다는 말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너 왜 자꾸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봤냐.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미안할 일을 자꾸 하게 되는 거다. 정말 미안하면 안 해야 하는 거다. 미안하다는 그 말이 듣는 사람을 인정머리 없는 인간으로 몰고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 거 너 모르냐. 안 미안해도 되는 방법을 알면서도 안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그는 따져 물었다. (153, 광장 근처)
나는 매일 조금씩 더 길어지는 하나를 체험하게 될지도 몰랐다. 수많은 하나로 나는 1500에 닿고 2000에 닿고 3000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그녀가 미리 까마득한 날들을 예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하나, 둘, 하지 않고 하나, 하나, 하는 데에는 나도 연습이 필요할 터였다. (189, 줄넘기)
그건 도움을 청하는 말이었을까.
애써 그런 쪽으로 짐작하려 했지만 와와의 낯선 표정과 굳은 얼굴, 검고 작은 눈동자를 채운 뜨겁고 위험한 기운 같은 것들이 자꾸만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213-214, 와와의 문)
노인은 이내 뭔가 장황하게 설명할 채비를 했다. 야무지게 입가를 닦은 뒤 소책자와 전단지를 몇 개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기다란 테이블 너머로 나올 기세였다. 그래서 그냥 서명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만든 피켓과 현수막과 전단지를 훑어보자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그게 또 딱히 반대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226, 비눗방울맨)
이 책을 다 읽은 날이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었다는 데 좀 의미 부여를 해보고 싶다. 21세기 현대의 노동과 그에 대해 숨기고 싶은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생각들을 이렇게 적나라하고 또 정직하게 다룬 소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공감도 이해도 더 쉬우면서, 소비자로 바라보던 세상과 노동자로 바라보는 세상의 채도가 많이 다르다는, 우울한 생각도 했다.
어두운데 해학적이라 블랙코미디 같단 느낌이 들기도 한다. 특히 「한밤의 산행」이나 「치킨 런」이 그랬다.
이 책에는 ‘제대로 된 일’이 아닌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비」의 개인 방송, 「아웃포커스」의 일인시위를 하는 엄마, 「한밤의 산행」의 철거용역들, 「치킨 런」의 치킨 배달원, 「광장 근처」의 DVD 노점상 등. 하지만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꾸중 외에 이들이 실제로 다른 일과 다른 삶으로 나아갈 가능성 같은 건 잘 보이지 않는다.
남겨진다. ‘이렇게 살기 싫다’고 떠난 선미 뒤에 여전히 ‘이렇게 살면서’ 같은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치킨 런」), “잘 지내고 있어. 너도 철수도.”하며 서둘러 은글슬쩍 포장된 떠나감과 남긴의 상태에 놓이고(「비눗방울맨」). 제자리에 머무는 듯한 느낌. 나만 남겨진 듯한 느낌. 「줄넘기」의 ‘나’가 이별 후 달리기나 자전거 같은 운동이 아니라 하필 줄넘기를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행동은 어딘가로 떠나고 나아가는 방향이 제시되지 않는 이 책에서 반복된다. 그게 꼭 비관적이라거나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대와 희망이 돋보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냥, 워낙 컴컴하니까 밝은 데서는 보이지도 않을 만한 작은 불빛이 눈에 띄는 것 같은 느낌.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들을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얄팍한 심리가 잘 드러난다. 이 책의 인물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파악한다. 한눈에 외부인인 걸 알아보고 출입을 금지하고(「쿵후하는 자세」), 당사자보다 먼저 해고자를 알아보고 기피할 수도 있고(「아웃포커스」), 도와달라고 하소연해야 할 사람인지 막말하고 시비 걸어도 되는 사람인지도 칼같이 구분한다(「광장 근처」). 딱히 그 사안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면서 서명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분명해지는 것도, 회사 앞에서 일인시위 하는 옛 동료를 열심히 못 본 척하며 출근하는 것도 간단히 말하자면 단순히 그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전교 일등인 학생들만 모아놔도 전교 꼴등은 생기고, 소심한 사람들만 모아놔도 지도자는 나타나고, 멀쩡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만 모아둬도 이상하고 튀는 사람은 생긴다는 ‘OO보존의 법칙’은 어떤 조직에서든 진짜일까? 그럼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위치가 선험적이고,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걸까? 그래서 학급 내 왕따랑 어울리다가 같이 따돌림당할까 봐 사리는 학생들처럼 사회에서도 다들 그 위치와 역할만으로 피하고 싶은 사람을 정하고 있나?
요즘 직업과 자아실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어릴 적 막연하게 배우고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 외의 생활이 없어도 일하는 게 즐겁고 그걸로 삶의 의미가 충만해져서 괜찮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아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재 평균 노동시간으로는 직업을 제외한 시간을 통해 자아실현 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적어도 주 3-4일 근무라면 반 정도는 생계를 위해 일하고 반 정도는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주 5일 8시간씩 근무하는 삶 속에서 직업이 생계유지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내가 나를 위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결국에는 ‘제대로 된 일’이 아닌 일들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일 텐데, 구인난과 구직난이 함께 성립하는 이 상황이 어떻게 해야 좀 더 나아질까? 각자의 자리에서 눈을 감고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며 뜀박질하는 태도가, 정말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