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murmur)> - 아주 많은 동물과 인간 하나
2021.05.27.목요일
에무시네마
1인가구영상토크쇼 1부는 영화 상영으로, 2부는 토크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상영했던 영화는 헤더 영 감독의 <속삭임>.
<속삭임murmur>(2019) 헤더 영
알콜중독자 도나는 동물 보호소에서 사회 봉사를 하다가 안락사가 예정된 늙은 개 찰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딸마저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상황에서 도나는 찰리에게서 큰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도나의 결핍감은 찰리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건지, 도나는 더 많은 동물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동물 보호소장이 감당할 능력이 없으면서 더 이상 입양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도나는 멈추지 못하고 보호소 밖에서 개인적으로 개, 고양이, 물고기, 햄스터 등을 찾아 입양해온다. 결국 도나의 집은 엉망으로 더러워진 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병이 악화된 찰리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도나를 찾아온 보호소 직원이 그 모습을 보게 된다. 손쓸 수 없이 상태가 악화된 찰리는 안락사하고, 다른 동물들은 모두 보호소로 돌아가고, 도나는 동물 보호소에서 봉사할 수 없게 된다. 아무도 없는 밤에 보호소에 들어간 도나는 찰리의 사체를 안고 누워있다가 다른 개를 한 마리 데리고 떠난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동물들의 모습이다. 인간 중심의 앵글이 아니라 동물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강아지나 아기 고양이들의 귀여움 때문이 아니다. 수술을 위해 마취당해 축 늘어진 개, 그 개의 절개된 배와 드러난 장기들, 피를 울컥 쏟으면서 새끼를 낳는 개 등 동물들의 ‘동물적인’ 모습들을 담아내는 게 눈에 띄었다. 흔히 귀여운 동물들을 보면 ‘인형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 보드라운 털 밑에는 뼈도 있고 근육도 있고 피도 있고 온갖 복잡한 장기들도 있을 텐데, ‘인형 같다’는 말은 마치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고 동물의 외형만 따와서 봉제인형처럼 생각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속삭임>은 동물들을 귀여움의 대상으로만 이용하지 않고 동물이 생물로 태어나고 아프고 병들고 죽는 장면들을 보여줬다는 게 좋았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관계와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도나가 끊임없이 동물들을 데려온 이유는 명확히 언급되진 않아도, 관계에 대한 갈증과 고독 때문이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아빠는 귀가하실 때마다 식구들이 문 앞에서 자신을 반겨주길 바라셨는데, 나는 이 바람이 집에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강아지에게 느끼는 사랑과 아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싫어하거나 위협하지 않을 존재, 다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겨주는 존재. 모든 고독한 인간들은 그런 존재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내가 나를 마음껏 표출해도 변함없이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해줄 존재를. 하지만 이런 관계는 ‘동등한’ 인간 사이에서는 성립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위협할 수 있는 만큼 너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내 인생에 네가 전부가 아니듯 나도 네게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과 결핍을 반려동물을 통해 해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반려동물에게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관계의 대상이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고받는 것의 성질은 비슷한 것이다. 실제로 단어를 놓고 보면, 인간도 동물이란 점에서 반려동물의 범주 안에 속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마음껏 할 수 있는 관계가 인간 사이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인간과 달리 반려동물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말에서 ‘마음껏’은 어느 정도 반려동물과 반려인 사이 힘의 격차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은 공간이 세상의 거의 전부일 너희에게서, 내가 어떤 인간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인간 중심적인 세상에서 살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너희 동물들에게서 나란 인간의 쓸모와 필요성과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어쩌면 마냥 아름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도나가 중독된 것처럼 동물들을 자꾸 데려오는 것, 그들에게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으려 하면서도 그만큼의 돌봄은 제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는 것, 결국 모든 동물들을 떠나보낸 도나가 죽은 찰리를 붙잡고 울다가 다른 개를 데리고 나오는 것. 안타깝고 쓸쓸하다. 하지만, 도나의 중독 증세가 동물들과 함께 하며 나아진 것인지, 아니면 알코올 중독 대신 관계 결핍에서 비롯된 동물과의 관계에 중독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건 사람이든 다른 동물들이든 혼자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도나의 사랑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해도, 도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도나와 동물들을 떨어뜨려두는 것이 둘 모두에게 더 좋은 방식이었을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함께 그 집에서 살아가는 게 그 쓸쓸한 존재들에게 최선이었던 거라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