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레터> 4회차 후기(윤나무, 려욱, 허혜진, 김지철 외) - 안녕 트리해진, 안녕 팬레터
뮤지컬 <팬레터>
2022.03.17. 20:00
코엑스아티움
캐스팅
윤나무(김해진 역), 려욱(정세훈 역), 허혜진(히카루 역), 김지철(이윤 역), 임별(이태준 역), 장민수(김수남 역), 송상훈(김환태 역)
※ 스포주의 ※
(이번 회차의 디테일을 짚으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이전 회차의 디테일까지 언급하게 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용적 비교일 뿐 모든 해석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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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십칠일, 해진으로부터
[2021-22 뮤지컬 팬레터] 해진의 편지 - YouTube
삼월 십칠일, 해진이 마지막 편지를 남긴 날이다. 이상하게 오늘은 해진이 편지와 함께 남긴 꽃이 계속 생각난다. 해진의 손에서 흐드러지게 만발해있었을 꽃은 바싹 말라있었다.
'그녀를 만나면' 저 산의 꽃을 모두 따주겠다던 해진에게 히카루를 사랑하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을지 생각해본다. 끝이 보이는 삶, 희망은 없고 외로움과 고통만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깊이 숨겨둔 마음을 건드리는 이가 나타났다. 설렘과 기대만큼 삶을 새롭고 풍요롭게 만드는 게 있을까. 해야 할 일도 못하며 편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그를 만나 꼭 안고 싶기도 영영 정체를 모르고 싶기도 할 만큼 누군지도 모르는 그가 소중해졌다. 어쩌면 마음은 혼자만의 환상 속에 있을 때 가장 뭉게뭉게 커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든지 말해요. 원하는 건 다. 도움만 된다면 다 할 수 있는 나."라고 노래하던 세훈의 달뜬 얼굴도 떠오른다. 지금까지는 세훈의 사기극이 자신의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세훈이 정말 해진을 위해 모든 걸 시작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세훈은 지독한 길티 플레져를 느끼지만... 적어도 그 사기극은 해진이 원하는 것이었다.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해진을 위한다는 목적에서 오답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선택.
나무해진은 <Muse>에서 편지를 따라 뛰어다니는 세훈을 보고 거의 확신한 것 같았다. <섬세한 팬레터>에서는 히카루가 누구든, 세훈이 누구든 묻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처음엔 히카루와 춤추며 웃고 세훈과 춤출 때는 의아해하던 해진이, 표정이 굳는 듯하더니 마지막엔 세훈과 마주 보며 웃음 짓는다. 세훈이 해진을 속인다는 죄책감에 슬퍼하면서도 함께여서 기뻐하듯이, 해진도 그랬다. 히카루가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고 슬퍼하지만 끝까지 함께해준다고 하니 기뻐한다.
해진이 어느 시점에 히카루의 정체를 의심하고 깨닫게 되는지는 매 공연마다 다르지만, <섬세한 팬레터>에서 의뭉스러운 히카루의 정체를 더 이상 캐내지 않기로 결심하는 건 공통적인 것 같다. 그래서 2막 <투서> 때 명일일보에서 원고 뭉치 아래 은밀하게 놓인 편지를 발견하고도 해진은 아무 말 없이 편지를 품 속에 챙길 뿐이다. 더 이상 놀라거나 의심하지도 않고, 세훈을 흘깃 바라보는 행동조차 의식적으로 피한다. 그러나 거짓에 모든 마음을 걸어버리는 건 너무 위태롭다. 1막에서 해진의 사랑은 달콤한 설렘뿐이었는데, 2막에서는 불안과 집착에 가까워진다. 명일일보 책상에서 편지를 발견할 때, 어두운 작업실에서 기다리는 세훈을 봤을 때, "네가 왜 여기에 있니?"하고 굳어버리는 순간들이 어김없이 생긴다. 미덥지 못한 배우의 실수를 목격한 상대 배우처럼, 불안하게 세훈을 지켜본다.
이미 거짓이란 것을 아는 마음이 모를 때와 같을 리가 없다. 보통 김해진 노선을 '글친놈'(글에 미친 놈)과 '히친놈'(히카루에 미친 놈)으로 구분하던데, 나는 1막에서 드러나는 김해진의 애정이 히카루를 향했든 그의 글재주를 향했든 <섬세한 팬레터>를 기점으로 히카루를 향했던 마음까지 결국 글을 향해 쏟아진다고 생각한다. 눈앞에 나타날 수 없는 히카루가 그걸 유도하고, 어렴풋하게나마 거짓을 눈치챈 해진도 사랑을 글쓰기의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히카루의 정체를 알겠다고 말하는 이윤에게 나무해진은 '이제' 히카루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편지와 원고만 받으면 된다.
"이제 더는 못 쓰겠어요."
결국 버티지 못한 건 세훈이고,
"꼭 죽여야만 했니. 히카루를, 꼭 죽였어야만 했니."
망가진 건 해진의 꿈이다.
해진은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려 했던 작품을 세훈이 망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위해 거짓을 눈감아주고 햇빛과 친구를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세훈이 모든 걸 망쳤다고 원망했을 것이다. 이제 다 끝났다는 허탈감과 절망과 함께, 다 거짓이 된 소설과 편지와 죽어가는 몸뚱이만 남았다는 현실에 숨이 막혀 세훈을 보듬어주지 못하고 그렇게 도망쳤을 것이다.
글자로 지은, 붕괴하는 성에서 겨우 도망치고 나서야 세훈이라는 사람을 겨우 떠올렸을 것이다. 줄곧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사랑의 편지를 써오던 사람을. <고백>에서 세훈을 그렇게 내친 게, 해진의 마음에도 오래 상처로 남았을 것 같다.
해진은 결코 의젓하거나 초연한 어른이 아니었다. 그래도 세훈에게는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었다. 각자 상대가 바라는 모습만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랑한 마음은 남아서 세훈은 모진 해진을 원망하지도 못하고, 해진은 마지막 편지를 썼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 세훈에게 편지를 쓴 해진이 그래도 조금은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세훈
어느덧 네 번째 세훈을 보았다. 려욱세훈은 지금껏 본 세훈 가운데 가장 내성적이었다. 쭈뼛쭈뼛 대면서 인사하는 세훈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무턱대고 집을 나와서 명일일보 급사로 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고 기특할 지경이었다. 그런 어둡고 소심한 모습이 세훈이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나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히카루의 존재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히려 천진하다기보다 조금 음침해 보이니까 안에 히카루라는 욕망이 숨 쉬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히카루와 함께 글을 쓰고 해진의 글을 읽으며 황홀해하는 모습과 이윤의 말을 받아치지 못하고 주먹만 꼭 쥔 채 굳어있는 모습 모두 좋았다.
그런데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너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에 빠져들어서 조금 따라가기가 벅찼다. 2막 <생의 반려> 때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느라 세훈 서사에 공백이 생겨서 그런가 그가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에 휩쓸리는 게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극을 통해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깊이 해진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구치소에서 고개도 잘 들지 못하다가 이윤의 손에 얼굴을 파묻고 "죄송해요. 죄송했어요, 계속."이라고 말하는데, 어린 애가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울컥했다. 아마 이윤도 비슷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해진이 어떤 마음으로 그 작업실에 남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떠난 세훈이 미웠을 텐데, 실제로 만난 세훈이 그렇게 움츠러들어 아이처럼 엉엉 우니까 모진 말은 다 사라지고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죽었을 때>에서도 세훈은 미처 다 삼키지 못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느라 애쓰는 모습이 너무 서러워보였다. 결국 세훈은 억지로 해진을 보내고 히카루를 다시 받아들였지만, 솔직히 오늘 려욱세훈은 정해진 가사만 아니었더라면 절대 '보낸다'고 말하지 못했을 것 같다. 몇 년이고 몇십 년이고 해진의 편지를 붙들고 살다가 먼 훗날 그 상처를 위로해주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서신을 주고받고 그렇게 팬레터2가 시작되는... 그런 삶을 살았을지도.
히카루
<섬세한 팬레터> 때 디테일한 연기들이 좋았다. 편지를 받은 해진이 병원으로 찾아가자 난감해하며 얼굴에 손을 올리던 모습이나 해진이 자신의 병을 고백하며 절박하게 매달리자 방법을 찾았다는 듯 씨익 웃던 표정, "나도 같은 병을 앓아요." 할 때 아파하듯 힘없이 말하다가 "그래도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면"이라고 노래할 때는 양팔을 쫙 펼치며 돌변하는 모습도.
그렇게 뭐든 제 마음대로 할 것 같은 히카루였는데, 2막에서는 죄책감에 젖어있는 것 같았다. <생의 반려>에서 껴안고 울던 해진과 윤이 안쓰러웠는지, 세훈이 느끼는 슬픔이 컸기 때문인지. 날카롭게 말하면서 세훈을 몰아붙이지만, 이게 틀린 길이란 걸 알면서도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거울>에서 해진 앞을 가로막고 원고를 들어 보일 때나 "세훈아,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하고 말하는 표정에는 이미 자책감과 삐뚤어진 고집만 남아있었다.
이전에 혜인카루는 <내가 죽었을 때> 세훈에게 돌아가는 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허카루는 놀라서 달려가는 것 같았다. 그 장면에 히카루의 대사가 있었다면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나를 그렇게 죽였으면 마음 편히 잘 살아야지, 왜 이러고 있어?"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세훈이 너무 깊은 슬픔에 빠져있어서, 그를 붙들어주려고 안아주는 것 같았다.
안녕, 팬레터
트리해진의 막공날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보는 4연 팬레터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다. 삼월 십칠일을 기념해 해진의 편지 낭독 커튼콜이 있었는데, 해진에게 편지가 삶의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는 게 느껴져서, 왜 나무해진이 <해진의 편지> 때 세훈에게 고맙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낭독을 그렇게 하니까 려욱세훈이 눈물을 못 그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4K] 220317 팬레터 스페셜 낭독 커튼콜 : 해진의 편지 윤나무 - YouTube
려욱세훈이 그렇게 봄을 보내지 못하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나도 해진 선생님과 팬레터를 보내고 싶지 않다. 내 삼월도. 해진이 마음 둘 곳이 필요해 편지의 주인을 그토록 사랑했듯이, 어쩌면 나도 사랑할 것이 필요해서 <팬레터>에 이렇게 마음을 줬나 싶기도 하다. 아쉬운 마음이 크고 집에서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도 헛헛하지만, 윤나무 배우님이 무대인사를 너무 담담하고 번듯하게 해 주셔서 어떻게든 잘 보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끝까지 좋은 공연 만들어주시느라 배우님들과 관계자분들께서 정말 정말 고생하셨을 것 같다. 이 겨울같은 봄에 <팬레터>를 만나서 삼월이 그렇게 삭막하진 않았다고,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산뜻한 이별은 다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해진 선생님, 다음 봄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