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플랜:데스룸>이 불편한 이유 – 프로그램 기획 면에서

'데블스 플랜’
절도와 폭력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허용된다. 출연자 간 배신과 모략을 장려하는 듯한 멘트가 입주 첫날 공언된다.
이 프로그램은 예능이지만 결국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드라마다. 예능은 주인공이 없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서사를 준비해두고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뿐이다. 그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출연자의 몫이고. 그런데, 그렇게 주인공 자리에 앉은 플레이어가 욕을 먹고 있다.
이런 두뇌 게임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주인공은 규칙과 도덕, 상식을 깨부수는 독보적인 존재다. 프로그램은 대놓고 비열한 짓을 일삼으라고 말하지만, 비열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비열한 짓을 일삼아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비열한 시도를 계속하지만 실패만 하는 무능한 사람도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런 캐릭터는 엑스트라로 나올 때 재미있지, 주인공일 수 없다.
즉, 시청자가 기대하는 주인공의 유형은 불리한 상황을 창의적인 꾀로 극복하는 트릭스터다.
정현규는 게임의 기획과 룰을 잘 이해하고 영리하게 플레이한 출연자였다. 기복 없이 플레이를 잘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활용해서 최적의 선택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청자로서 나는 그가 승리하는 게 기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은 분명히 그의 주인공 서서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응원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불편감은 그의 탓이 아니다. 그가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다른 것들이 필요했다.
문제점
피스의 힘: 사실 이게 불편감의 핵심이다. 초반 게임의 승기를 잡아서 많은 칩을 확보하면 그 격차를 메꿀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힘이 너무 강력하다 보니까, 주인공 트릭스터의 무기보다는 그가 깨부숴야 할 장애물에 가까워 보인다. 문제가 생겨도 돈을 쏟아부어서 해결하는 거? 현실에서 질리도록 많이 봤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보고 싶지도 않고, 전혀 멋져 보이지도 않는다.
연합: 피스의 개수에 따라 머무는 공간이 ‘생활동’과 ‘감옥동’으로 나뉜다. 피스의 부익부빈익빈이 유지되면서 생활동과 감옥동에 머무는 사람들도 고정되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집단 사이 유대감이 돈독해지고, 게임은 결국 ‘피스 많은 집단’ vs ‘피스 적은 집단’의 구도가 되고 만다.
> 이 고착화가 게임의 변수를 너무 줄여버렸다. 이런 환경에서 트릭스터는 ‘피스 많은 집단’에 속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그 집단의 핵심이었고, 여기서 오는 인지부조화가 불편감을 유발한다. 트릭스터의 자질을 갖춘, 악착같이 플레이하고 기존 판을 깨부수려는 포지션의 플레이어들은 피스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 주인공은 기존 룰과 많은 재화를 이용해 게임을 안정적으로 운용한다. 애초부터 출연자의 팬심으로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고 보는 게 아닌 이상, 프로그램의 주인공 서사에 몰입해 주인공에게 박수를 쳐주기는 좀 어려워지는 것이다.
개선안
판을 더 적극적으로 흔들 장치가 필요하다. 아마도 생활동과 감옥동에 있던 히든 스테이지를 그런 장치로 만들어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더 자주, 더 위험한 기회를 많이 심어뒀으면 어땠을까. 이세돌이나 저스틴 민 같은 솔로 플레이어들이 활용할 기회가 더 많았다면, 연합의 안정성이 줄어들고 게임은 더 흥미진진해졌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게임이 연합 중심으로 흘러갔다는 점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최대한 개인전으로 할 수밖에 없는 세팅이 더 필요했다. 계속 함께 플레이하던 연합을 배신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서로 외롭게 물어뜯으며 싸우는 것을 기본으로 두되, 때로 생존을 위해 적의 손을 잡아야 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게 훨씬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개선 아이디어-
메인매치 형식의 다양화: 연합이 무조건 유리한 방식의 게임들로 진행하는 대신, 토너먼트 방식의 게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메인매치 플레이 경험이 유대감을 만들고 그 유대감으로 다시 연합하고 게임을 거듭하면서 더 끈끈해지고... 이런 순환을 끊고 각 플레이어의 주의를 환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피스 견제법: 타 플레이어와 피스 개수를 바꾸기, 전원 0개로 리셋하기, 피스 개수만큼 페널티 주기 등. 피스가 많은 플레이어를 견제하거나, 피스를 재분배할 방법이 다양했다면 준결승처럼 재미없고 답답한 흐름이 이어지진 못했을 것이다.
왕좌의 시련: 피스를 따는 것뿐 아니라, 유지하기 위한 리스크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옥동 데스매치처럼, 생활동에서도 피스를 잃을 요소가 있다면. 주인공이 시련을 견뎌서 ‘피스를 차지할 자격’을 계속 증명했다면 그 우위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예를 들어, 피스가 가장 많은 사람은 그날 반드시 매치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기면 그 피스를 지키고, 지면 피스를 절반만 남기고 감옥동으로 가게 된다거나.
공동의 적: 데블스 플랜이니까 ‘데블’을 좀 더 활용해도 좋지 않았을까? 그럼 시청자도 극복해야 하는 적이 ‘피스 많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데블’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서로 피 튀기며 경쟁하던 라이벌이 데블을 이기기 위해 힘을 합치는 모습이 나왔다면 명장면이 되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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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번영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게임이든 다수가 협력하면 가장 리스크를 줄일 방법이 생긴다. 이런 게임에서 공고한 연합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종류지만, 한편으로는 야생에서 인간은 이런 식으로 살아남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 시청자들은 출연자들의 답답한 처신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불확실함을 줄이고 안전한 선택을 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가진 게 많으면 최대한 안전한 판을 깔고, 강적을 적대하다가 위험해지기보다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이익과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이런 심리기제를 극복하고 진정성 있고 흥미진진한 대결을 펼치는 걸 그저 출연자들의 호승심에만 기대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된다.
히든 스테이지도 재밌고 캐릭터들도 정말 매력적이었는데... 프로그램을 다 보고 남은 건 통쾌함이 아니라 불쾌한 우울감이었다. 물론 이번 시즌도 스케일 크고 재밌었지만 시즌3는 이런 점들이 보완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