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정동극장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 2021.06.01.-2021.06.27.
- 국립정동극장, 프로젝트그룹 일다
- 번역 임수현 연출 민새롬 음악 박승원 무대 김종석 음향 정재윤 조명 이현규 영상 이수경 의상 도연 기술/무대감독 구봉관
- 손상규, 윤나무
관람 일자: 2021.6.10.(손상규) & 2021.06.24.(손상규)
이 연극을 보며 느낀 것을 제대로 언어화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1. 100분, 인터미션 없음, 모노극
백 분 동안, 인터미션 없이, 단 한 명의 배우가 이끌어가는 연극이다. 백 분 동안 내 감각은 무대 위 단 한 명의 배우를 따라다녔다. 6월 10일에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서 배우가 움직일 때마다 내 고개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러니까 내가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고스란히 눈에 담으려고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마저 신기한 감각이었다. 오랜 시간 한 사람만 보고 있는데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더 보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99분 전과 다를 바 없을 동일한 신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것이 정신없이 재미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허겁지겁 숨 쉴 틈 없이 먹는 느낌. 내가 사람을, 사람의 움직임을 그렇게 관심 있게 본 적이 있었나?
서술자, 시몽 랭브르, 소방관, 코르델리아 아울, 피에르 레볼, 마리안, 토마 레미주, 마르뜨 꺄라르, 아르팡 교수, 줄리엣, 클레르 메잔, 비르질리오 브레바, 알리스 아르팡 – 하나의 몸에서 이 많은 인격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코르델리아 아울에서 한 발짝 옮기면 피에르 레볼이 되고, 눈물을 글썽이던 마리안이 무대를 한 바퀴 돌아 토마 레미주가 되고, 비르질리오 브레바가 있던 그 자리에서 조금 어깨를 움츠린 마리안이 되었다. 방금 전과 똑같은 팔과 다리, 이목구비, 머리카락과 옷이 금방 다른 캐릭터가 된다. 제한적인 물질의 몸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된다. 말하는 법, 걷는 법, 얼굴이나 손을 움직이는 습관에 가까운 방식들에 따라 같은 몸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게 – 생각해보면 빙의 드라마 같은 곳에서도 전제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 새삼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시몽 랭브르의 심장을 둘러싼 각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과 입장은 가볍게 넘나들거나 뭉뚱그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상이하고 선명한 것들이었는데도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무리하게 느껴지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나게 몰입하면서 봤는데, 아마 엄청난 밀도로 집중하고 있던 배우의 에너지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같은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더니 전혀 다른 인물의 절망으로 젖어들던 배우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혼자서 100분 동안 무대를 꽉 채워야 하는 연극이었다. 엄청난 대사량과 인물들의 등퇴장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는데, 그 긴박하고 숨 가쁜 전개를 혼자 이끌어가는 배우의 에너지와 집중력에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백 분 동안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극의 터질 듯 말 듯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로 열셋 정도의 캐릭터를 연기하고 빠르고 정확하게 모든 대사를 말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단 십 분의 발표 내용도 외우기 싫어했는데, 백 분의 대사를 완벽히 암기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빠르게 말하다 발음이 꼬일 때는 있어도 대사가 기억이 안 나 머뭇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마치 그 문장들을 완벽히 씹어 소화해 신체의 일부처럼 꺼내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건 대체 무슨 기분일까? 노래로 자신의 몸을 새로 발견했다는 토마 레미주의 두 번째 탄생과 비슷하지 않을까? 부러웠다. 아마 소설에서 길어왔을 아름답고 날카로운 문장들을 나도 갖고 싶었다. 예전에 암송했다가 잊어버린 소네트를 괜히 다시 찾아 읽었다.
2. 서술, 마일리스 드 케랑갈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한 심장의 24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스무살 시몽 랭브르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기 전 살아있음을 느끼며 파도를 집어삼키던 새벽 5시 50분부터, 클레르 메잔의 몸속에서 새로운 심장이 뛰던 24시간 뒤의 새벽 5시 50분까지의 이야기. 이 작품이 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인물들의 말과 생각들을 담아내는 방식을 민새롬 연출님은 ‘공정한 태도’라고 하셨고 손상규 배우님은 ‘존중’이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다 과도한 슬픔 없이 사망 확인 절차를 진행하는 의료진 피에르와 코르델리아. 아들의 죽음과 동시에 아들이라고 여겼던 것의 적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마리안과 션. 절차보다 유가족의 의사를 존중하는 능숙한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심장을 다루는 건 기계 정비와 다르지 않다는 섬세하고 유능한 기술자 비르질리오. 누군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복권 같은 행운이 되었음을 아는 클레르. 심장 이식은 기계 부품을 옮기는 것 같은 일이 아니라 생명의 마지막 힘, 초월적이고 잠재적인 힘이라고 생각하는 알리스. 장기 이식은 누군가에겐 끔찍한 고통이고 불행이고 비극이고, 누군가에겐 기적 같은 행운이고, 누군가에겐 일이고 직업이고 기회다. 시몽의 심장이 보낸 24시간은 이 누군가 중 하나가 아니라 누군가‘들’의 시간이었다. 날카롭고 격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넘어지지 않고 ‘서술’하는 이 연극의 균형감각이 매력적이었다. 하나의 메시지를 위해 사건과 감정을 쌓아 고양감을 준다기엔 산산이 흩어진 유리 조각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전히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라고 해야 할까, 경이로웠다.
등장인물에 따라 서술자의 목소리는 계속 변하지만 어쨌든 모든 건 서술되고 있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대사)” “(대사)” (인물3)은 말했다. “(대사)”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서술자가 아니다. 인물과 같은 목소리로 흥분하고 초조해하고 슬퍼하는 서술자다.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서술자가 아니라 모두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와 자신만의 서술자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서술되는 연극이라서,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충만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름다운 문학 언어를 말하기 위해 연극을 서술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한 문장 한 문장 그냥 상황과 사건을 위한 게 아니라 기억하고 곱씹고 싶은 문장들이라 또 정신이 없었다. 여러모로 나한테는 감각 과잉이었던 것 같다. 배우의 연기도, 희곡 텍스트도 다 소화하고 싶었는데 체할 것 같았다. 그것들을 받아들이느라 애쓴 바람에 극이 끝나고 그렇게 진이 빠졌었나 보다. 느릿느릿 극장을 나오면서 별 5점짜리 영화의 기준은 ‘못 일어나겠다.’라는 이동진 영화평론가님의 말이 떠올랐다. 어쨌든, 그 문장들 때문에라도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의 문장들이 소설의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연극 대사가 생생하게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이번 여름엔 마일리스 드 케랑갈을 읽자.
3. 심장의 폐위, 뇌의 즉위, 생명
심정지는 더 이상 죽음의 신호가 아니며, 이제부터 죽음을 확정 짓는 것은 뇌 기능의 정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렇다. 만일 내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59년 피에르 몰라레의 논문 <불가역적 혼수상태>를 기점으로 죽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심전도계에서 뇌전도계로 바뀌기 시작했다. “심장의 폐위와 뇌의 즉위”라는 말이 뇌리에 박혔다. 나는 아직도 생명 하면 뇌보다 새빨간 심장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비록 기계의 도움에 의존한다지만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혈색이 돌아도 뇌가 죽으면 죽은 것으로 인정된단 사실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부터 뇌사가 사망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왜 몰랐을까? 왜 모르면서 한 번도 죽음의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죽음만은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이 모호하고 임의적이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만큼은 확실하고 절대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몽의 장기 적출 수술에 참여한 코르델리아는 혼란스러워한다. 장기 적출은 눈앞에 누워있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던 그전까지의 수술들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위한 수술이란 점에서는 같다. 비가역적 코마 상태에 빠진 시몽은 죽었지만, 그의 심장은 살아있고 클레르의 몸에서 계속 살아있을 테니까. 시몽은 죽었지만 시몽의 심장은 살아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죽음의 기준이 뇌사이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시몽이 뇌 기능이라면, 그러니까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시몽이라면, 심장은 뭘까? 심장을 비롯한 시몽의 신체는 시몽의 소유였다가, 그의 죽음 뒤에 남겨지는 유품 같은 것일까? 그리고 뇌 기능이 곧 내 생명이라면, 훗날 내 사고회로를 학습하도록 만든 인공지능이나 내 뇌를 이식한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게 내가 되는 건가? 하지만 왠지 그때쯤엔 죽음의 기준도 또 바뀌어있을 것 같다.
시몽의 부모님은 장기 적출에 동의하면서도 눈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마리안은 시몽의 얼굴을 보며 그게 바로 하나뿐이고 온전한 시몽이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시몽의 부모님에게 시몽의 존재는 그의 얼굴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는데, 생각해보니 이해가 된다. 나를 알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내 심장이나 뇌나 다른 신체 일부를 보고 ‘나’라고 생각하는 건 조금 비현실적이다. 사람들에게 나를 의미하는 것, 사람들이 나의 가장 고유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내 얼굴일 테니까.
4. 소리, 심장 박동, 파도
이 연극은 심장 박동 소리로 시작해서 파도 소리로 끝난다. 암전된 극장 가득히 채우는 심장 박동의 울림과 스피커 쇠붙이가 진동하는 작고 분명한 소리가 좋았다. 그 공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소리를 함께 듣고 있다는 게, 엄청나게 거대한 심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데 내 안에 하나의 심장이 있다는 게, 그리고 이 공간에 수십 개의 심장이 같이 뛰고 있을 거라는 게 떠올라서.
극 중 비르질리오가 클램핑하기 직전 토마가 시몽의 귀에 워크맨 7번 트랙을 들려줄 때, 나는 이 연극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그때의 감각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거대한 파도 소리.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사방에서 나를 삼켜버릴 듯 사납고 격렬하게 몰아치는 파도소리만 들렸다. 무대 쪽으로 쏠려 있던 내 감각이 내 안으로 돌아왔다. 아주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 같았고 무서웠는데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생에 관한 경이롭고 치열한 것들이 내게도 있다.
5. OPT-IN 제도
마리안과 션은 시몽의 죽음을 알게 되자마자 장기 적출 여부를 고민해야 했다.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결정해야 했던 마리안과 션, 그리고 그들에게 장기 적출 이야기를 힘겹게 꺼내는 토마 레미주 모두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만약 내가 시몽 같은 상황이라면 가족이 내 죽음 외에 더 무겁고 가혹한 것을 견딜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장기 기증 의사를 분명히 해두는 게 모두에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죽은 사람 의사 추측해보면서 괴로워할 필요 없도록. 프랑스와 달리 우리나라는 별도로 기증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장기 기증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OPT-IN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기증희망 등록방법 < 기증희망등록 <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konos.go.kr)
이 글 쓰는 김에 등록했다. 장기(신장, 간장, 췌장, 췌도, 심장, 폐, 소장, 안구, 손, 팔 등), 안구(각막), 조직(뼈, 연골, 근막, 피부, 양막, 인대, 건, 심장판막, 혈관 등)이라는 글자를 보니까 기분이 좀 묘하다. 나는 사후 내 신체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이 통합적으로 기능하지 않아서 내게 ‘나’로서의 의미를 잃는 것과 저렇게 낱낱이 해체되어 각자의 쓸모를 위해 흩어지는 건 또 다른 느낌이구나. 지금 내 몸이 신장, 간장, 췌장, 췌도, 심장, 폐, 소장, 안구, 손, 팔, 근막, 양막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내가 죽고 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낯설다.
사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몸의 감각이 둔해지고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당연하게 살게 될 때가. 그럴 때 가끔 꺼내 봐야겠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수선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지.
원작 소설 리뷰:
마일리스 드 케랑갈『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심장에서 피고 지는 모든 생명을 위하여 (tistory.com)
마일리스 드 케랑갈『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심장에서 피고 지는 모든 생명을 위하여
마일리스 드 케랑갈,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열린책들, 2017 이건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자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삶과 죽음은 떨어지지 못하고 얽혀서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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