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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스 드 케랑갈『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심장에서 피고 지는 모든 생명을 위하여

by 끄적고구마 2022. 2. 18.

 

마일리스 드 케랑갈,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열린책들, 2017

 

 

이건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자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다. 삶과 죽음은 떨어지지 못하고 얽혀서 동시에 그렇게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 시제로 말하는 문장들이 이 이야기를 과거에 붙박지 않고 계속 현재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불운한 죽음을 맞고, 누군가는 기적처럼 삶의 기회를 얻고, 구급대원과 의사들과 장기 코디네이터가 땀을 흘리는 만(滿) 하루는 현재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김없이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그 하루다.

그녀 인생의 중요한 시기가, 아직까지도 따끈하고 속이 꽉 찬 육중한 한 시기가,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가 만료된 시간을 향해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떨어져 내리며 자취를 감춘다. (53-54)

 

한 사람을 영영 떠나보내는 건 나의 한 시기가 영영 져버렸음을 의미한다. 원래도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 없고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지만, 아직 따뜻하던 온기가 식어버리고 생생하던 음성이 다시 들리지 않으면 비로소 열과 육체와 생명으로 가득 찼던 그것이 이젠 팔을 뻗을 수 없는 곳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실감한다. 닫혀버린다. 돌이킬 수 없다.

생명은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그 어떤 상황도 역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그 말.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는 건 없어, 그 무엇도. 그녀는 걸핏하면 그렇게 주장해 버릇한다(그럴 때 그녀는 가벼운 어조를 취하고, 낙담한 사람을 부드럽게 다독이듯이 문장을 리드미컬하게 말한다.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없어, 죽음이나 장애를 빼면. 그러고는 어쩌면 뱅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려나. 어쩌면 스텝을 밟으려나). 하지만 시몽, 그 아이는 아니다. 시몽, 그 아이는 돌이킬 수 없다. (100)

 

사고를 당한 시몽은 비가역코마 상태가 되어 사망 판정을 받는다.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아 계속 심장이 뛰는 시몽이 사망으로 간주된 이유는 1959년 굴롱과 몰라레의 발표 이후로 프랑스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뇌사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3대 유지 장기인 심장, , 뇌의 기능이 모두 멎는 것은 심폐사라고 부르며 원칙적으로 법의학과 민법에서는 이를 죽음의 기준으로 세우고 있다. 식물인간과 달리 뇌사 상태에서는 자발적 호흡이 불가능하지만, 의료기기를 이용하면 호흡할 수 있는 인간을 사망한 상태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에서 뇌사 판정을 인정하는 이유는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뇌사자에게 오랜 연명 치료를 지속하는 데 따르는 문제와 장기 이식을 통해 다른 생명을 구할 기회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도 2000년부터 장기 이식을 위한 뇌사 판정을 인정했다.

시몽의 심장은 수도권으로 이동했고, 그의 간과 폐는 지방의 또 다른 지역들에 도착했다. 그것들은 다른 육신들을 향해 질주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308-309)

렘브란트 <해부학 강의>

뇌사를 둘러싼 논쟁과 죽음의 기준을 논하려면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라는 의식은 어디서 올까? 레비는 마리안에게 시몽의 죽음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한다. “아드님에게서는 관계적 삶의 기능들이, 달리 말하자면 의식, 감각, 운동성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자율 신경 기능도 마찬가지고요.”(116) 나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귀도 있고 손도, 발도, 심장도, 폐도, 간도 있지만, 내 눈이나 심장이 인 것은 아니다. 내 심장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엔진도 그것만으로 자동차라고 불리지 않는 것처럼, 생명의 직관적인 상징인 심장도 그 자체로 생물일 순 없다.

차라리 라는 하나의 의식, 내 모든 신체와 장기를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는 뇌에 가까울 것이다. 감각과 생각을 통일하는 주체는 뇌의 기능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선험적 형식이 주어져 있을 때 통일된 의식(통각)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통일된 의식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시간과 공간에 심장(혹은 육체), 통각에 뇌(혹은 의식)를 빗대어보려 한다. 뇌가 라는 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심장이 뛰는 육체가 선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심장은 내가 피어날 육체라는 시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뇌의 작용으로 발현되는 의식이 외부 대상을 감각하고 내적 통일성을 감지하는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세상에서 나는 육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지만, 의식이 꺼진 육체를 곧이 나라고 할 수도 없다. 심장이 뛰고 혈색이 도는 육체는 내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의 전부, 어쩌면 영토 혹은 세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라는 의식적인 존재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내 죽음과 동시에 혹은 그보다 조금 늦게 허물어진다. 비르질리오의 말대로 가장 먼저 형성되는 심장이 또한 가장 늦게 사라지리라”(280).

삶이 태어나기 위한 필수 조건이자 나의 생 동안에는 나 자신인(혹은 자신의) 것은 그래서 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고유함과 모든 을 전제하는 보편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그러니까 시몽의 심장이 클레르에게 이식되는 이 하루는 바로 그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몽의 모든 삶을 함께했던, 다른 누구도 아닌 당연히 시몽의심장이었던 것이 더 이상 시몽과 함께 띌 수 없게 되고 다시 삶의 전제 조건으로 남은 순간, 그것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위한) 공공의 목표로 움직이는 여러 인물의 손을 거쳐 이번에는 클레르의심장이 된다. 이번에는 그곳에 클레르의 삶이 자리를 잡는다.

마취가 불러온 꿈속에서 클레르는 토마 레미주의 노래를 들었을까? 그 평온한 죽음의 노래를? (...) 그녀가 하얀 외투를 다시 걸치고 그가 그 하얀 모피 깃을 쓰다듬는 동안. 마침내 키 작은 초목 주위로 조금씩 빛이 스며들고, 이끼에 푸른빛이 돌고, 방울새가 노래하고, 그 거대한 파도타기가 디지털 문명의 밤 속에서 갈무리되는 동안. 현재 시각, 5시 49분. (341-342)

 

그렇게, 이 소설은 심장이라는 생명의 자리를 통해, 그리고 하루라는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여 시몽 개인의 죽음을 가장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이 스물네 시간 동안 한 사람은 죽음을 맞았고, 몇 명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며, 어떤 사람은 복권 같은 수선의 기회를 얻었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이 하루는 멈추지 않는다. 심장이 르아브르 병원과 파리의 피티에살페트리에르 병원을 잇고, 시몽의 죽음이 클레르의 삶에 닿는다. 시계처럼(시계가 멈춘다고 시간도 멈추지는 않는다)-소설만, 철썩거리는 파도를 연거푸 얻어맞은 것 같은 하루의 마지막 순간에 멈춘다. 다시 아침이 밝고 의사들이 수술복을 벗고, 알리스는 미소를 짓고, 비르질리오는 농담을 하고, 함께 외투를 입고 식사를 하러 가는.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