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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시

TOM 1관 뮤지컬 <랭보>

by 끄적고구마 2022. 12. 8.

  • 2022.12.07 20:00
  • 대학로 TOM 1관
  • 캐스팅: 정욱진, 김지철, 문경초


솔직히 초반에는 좀 과할 줄 알았다.
시인으로서 고난의 길을 자처하며 진리를 찾으려 하고, 천재 시인들끼리 영혼의 교류를 하는 이야기가 현대 한국 시민 1(혹은 앉은뱅이)의 눈에 과하지 않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나 결국에는 같이 울었다. 쓸쓸하고 고독해서 울었다.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남들이 떠드는 얘기 따위는 신경쓰지 않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시인이라는 역설이 쓸쓸하고 오만하고 고독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하는 단 하나의 존재에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며 빛났던, 눈동자엔 태양을 담고 누더기를 입고 착실하게 모험하는 이들.
그들은 서로의 시를 아끼고 질투하고 사랑했으며 아마 서로에게 가장 훌륭한 독자였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나약하고 비겁해. 난 많은 것들이 두려워. 비난받는 거, 실패하는 거, 죽는 거. 난 너처럼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마침내 인생의 구원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 철없는 구원자를 먹여살리는 고독과 발붙여 살아오던 안정을 저버린 불안을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했던 베를렌느. 김지철 배우가 연기하는 베를렌느는 겉으로만 단단해보이는 유리 같았다. 굳은 표정과 명예로운 신사의 모습 뒤로 끝없이 혼란과 불안을 겪으며 요동치던 사람.

사실 나는 베를린느의 고독에 더욱 몰입했지만, 랭보가 탁자 위에 위태롭게 서서 "날 이해해?"라고 물을 때, 랭보 역시 혼자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계 걱정은 모두 베를렌느에게 떠넘기고 시 쓰는 데만 집중하던 랭보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지만
베를렌느가 떠나려하자 미안해, 내가 미안해 하며 붙잡으려 했던 랭보는, 어쩌면 그 순간을 최대한 미루기 위해 불안하지 않은 척 더 확신에 찬 척 오만하게 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대본집을 읽어보니 랭보가 미안하다고 하는 대사는 없었다. 오늘의 랭보가 베를렌느를 간절하게 사랑했던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과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찬란히 빛나는 사랑은
늘 나를 울게 한다.

아, 정말 고약한 결말이다! 이토록 불행하기도 쉽지는 않을 거다.
쏟아지는 자신의 피를 보며 죽어가는 순진한 짐승처럼...


두 사람의 영혼을 향유하던 여정은, 마치 서로를 갉아먹고 '정말 고약한 결말'을 맞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누구도 주저앉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토록 불안에 떨며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도망칠 것 같던 유리 같은 베를렌느는 마지막까지 숨거나 포기하지 않고 시를 썼다.
더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한순간의 영광과 환희에 모든 것을 바칠 듯 보였던 악마 같은 랭보는 고통까지 즐기며 괴로운 삶을 착실하게 음미했다.
고백하자면, 처음 무대를 보고 랭보가 기찻길에 투신해 죽는 엔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랭보가 직접 그 가능성을 단단히 닫아줘서 기쁘고 부끄러웠다.

그 연약하고 단단한 마음이 아름다웠다.

사랑스런 사람이여
지금은 꿈을 꿔야 할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



+)
무대는 화려하지 않고
조명은 차갑지 않고
음향은 박하지 않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