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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스 플랜:데스룸>이 불편한 이유 – 프로그램 기획 면에서 '데블스 플랜’절도와 폭력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허용된다. 출연자 간 배신과 모략을 장려하는 듯한 멘트가 입주 첫날 공언된다.이 프로그램은 예능이지만 결국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드라마다. 예능은 주인공이 없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서사를 준비해두고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뿐이다. 그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출연자의 몫이고. 그런데, 그렇게 주인공 자리에 앉은 플레이어가 욕을 먹고 있다.이런 두뇌 게임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주인공은 규칙과 도덕, 상식을 깨부수는 독보적인 존재다. 프로그램은 대놓고 비열한 짓을 일삼으라고 말하지만, 비열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비열한 짓을 일삼아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비열한 시도를 계속하지만 실패만 하는 무능한 사람도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다. 그런 캐릭터는 엑스트.. 2025. 5. 23.
줄리애나 배곳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읽고 있는 책 제목이 멋지다고 했더니, 동생이 듣고는 "시집 같네."라고 말했다.단편 '포탈'을 읽으면서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 정말 시 같은 글이어서.'포탈'은 어느 날부터 세상에 생기기 시작한 기묘한 포탈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영화 이 떠올랐다. 그 구멍을 통해 사람들은 다른 세계를 엿보고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범위가 넓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우리 중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 슬픔은 우주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고.그리고 우리에게는 슬픔이 부족하지 않았다.이 구멍이 왜 생기는지, 이 현상으로 세상이 어떻게 전복되는지, 이 이야기는 그런 것들엔 관심이 없다.그저 이 기묘한 현상이 익숙해지고 아무렇지 않게 그런 세상에서 사는 풍경을 그려낼 뿐이다. 비현실적으로 아.. 2025. 3. 20.
이은희 『4줄이면 된다』 - 길 잃은 창작자를 위한 길잡이 이은희,『4줄이면 된다』, 부키, 2025요즘 작법 공부를 하고 있다.아는 게 없고 용감만 한 작가지망생이 종종 그러듯이, 나도 처음에는 무턱대고 이야기를 써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엄청 고생했다. 내가 이야기를 장악하지 못하고, 내가 뭘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중간에 한참을 헤맸다. 길을 잃고 나서야 작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이전 세대의 지식을 빌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작법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영웅의 여정 12단계나 『Save the cat!』의 15장은 구체적인 이야기 단계를 구상할 때 도움이 되는 지침이고, 『픽사 스토리텔링』은 이야기의 뼈대를 잡을 때 혹은 초고를 점검할 때 유용하게 볼 수 있는 책이었다.그리고 이 책 『4줄이면 된다』는 기획 단계, 초고.. 2025. 3. 16.
(기대평)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책 제목을 본 순간 홀린 듯 서평단 이벤트를 신청했다.우주의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이런 제목으로 전하려는 이야기는 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책에 수록된 단편 중 두 이야기가 예쁜 종이 봉투에 담겨 왔다. 내가 받은 건 과 . 두 편만 엮은 가제본은 작고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도 좋다. 펼치면 금방 다 읽어버릴 것 같다. 2025. 3. 10.
<룩백> "만화는 보는 게 좋지, 그리는 건 별로야." 한 명의 작가가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꼭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재능 또는 허영심. 남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칭찬이 듣기 좋아서. 그 다음에는 질투심. 남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 다른 무엇보다 더 많이 오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마지막으로, 독자. 작품을 봐주고 기다리는 사람. 그래서 후지노는 팬이라고 하는 쿄모토를 만나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 역시나 연출이 좋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을 그저 윗머리 일부분만 잡는 앵글 같은 것. 2024. 11. 14.
충무아트센터 블랙 <사운드 인사이드> - 쓰이는 여백 때로 우리는 첫눈에 마음이 통하는 낯선 사람들을 알아본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두 사람의 대화는 도스토옙스키에서 시작된다. 벨라의 인용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크리스토퍼가 "그런 고상한 말이 떡갈나무로 장식돼서 후대에 이렇게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하고 비웃자 벨라는 "러시아에 떡갈나무가 있었을까? 자작나무면 몰라도."라고 응수한다. 극의 끝에서 크리스토퍼는 도스토옙스키의 러시아 같은, 눈 내리는 자작나무숲에 서있다. 크리스토퍼는 벨라 사무실의 그림을 보고, 그림 속 여자가 교수님 같다고, 발자국 하나 없는 눈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지만, 끝내 그 풍경 속에 자신이 선다. 벨라는 빛을 받으며 크리스토퍼의 속내를 가늠해보려 문장을 쏟아내는데 크리스토퍼는 내리는 눈만 바라볼 뿐 아무.. 2024. 10. 26.
<대도시의 사랑법> - '내 이십대의 외장하드'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가 있어." "사람들은 자기들이랑 다르면 열등한 거라고 그래. 그래야 마음이 편하거든. 그게 진짜 열등감인 줄도 모르고." "베프끼리 같이 살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서울 방값이 얼만데!" 영화를 보기 전부터 도발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아는 내 눈에도, 재희와 흥수가 얼굴을 맞대고 웃는 사진에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이 새겨진 포스터는 흔하디 흔한 헤테로 로맨스물 같았으니까. 사전정보 없이 적당한 킬링타임용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헤테로 커플들 또는 가부장적 가족들이 있다면 꽤 당황했을 것 같다. 기대와 다르면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연재물이 아니라 극장에서 표를 사면 무를 수 없는 '영화'이기에 할 수 있.. 2024. 10. 16.
<인사이드 아웃 2> - 누구나 불안이를 품고 살잖아요 영화를 보기 전에 불안이의 목소리를 연기한 마야 호크의 인터뷰 클립을 먼저 보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불안이 그 자체라 캐릭터 연구를 할 필요도 없었다는 배우는 매 순간 자기 안에서 수십 가지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잘해야 한다는 조급함, 아직 부족하다는 자책, 실패에 관한 두려움 따위는 현대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은 감정들일 것이다.불안이가 등장해 기존 감정들을 유리병 안에 가두어버리고 지휘권을 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 상태로 일상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물론 그것도 모두 라일리를 위한 것이긴 하다. '더 나은 나'가 되어야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라일리 안에 있.. 2024. 7. 16.
이슬아,『심신 단련』 - 장르는 수필, 태도는 사랑 이슬아, 심신 단련, 헤엄출판사, 2019 난 원래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면 논픽션은 잘 읽지 않는다. 그래서 에세이도 별로 읽어본 게 없다. 세상에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알고 싶을 정도로 내가 깊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런데 어쩌다 이 책을 읽고 웃고 있을까. 이번에도 나는 공부를 한 것 같기도 하다. 심신 단련, 이 책의 명료하고 유쾌한 문장들처럼 가볍지만 단단한 삶의 태도를. 탐이, 복희, 하마, 두렵고 불안하고 지난한 일과 일상들까지. 나는 이슬아의 글들에서 사랑을 발견한다. 누군가의 수많은 모습들을 발견하고 기억하는 것, 스치는 일상의 시간들을 수필로 담아내는 것. 삶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나는 누.. 2024.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