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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4

<룩백> "만화는 보는 게 좋지, 그리는 건 별로야." 한 명의 작가가 태어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꼭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재능 또는 허영심. 남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칭찬이 듣기 좋아서. 그 다음에는 질투심. 남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노력. 다른 무엇보다 더 많이 오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마지막으로, 독자. 작품을 봐주고 기다리는 사람. 그래서 후지노는 팬이라고 하는 쿄모토를 만나 비로소 작가가 되었다. +) 역시나 연출이 좋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충격적인 소식을 그저 윗머리 일부분만 잡는 앵글 같은 것. 2024. 11. 14.
<대도시의 사랑법> - '내 이십대의 외장하드'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가 있어." "사람들은 자기들이랑 다르면 열등한 거라고 그래. 그래야 마음이 편하거든. 그게 진짜 열등감인 줄도 모르고." "베프끼리 같이 살 수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서울 방값이 얼만데!" 영화를 보기 전부터 도발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아는 내 눈에도, 재희와 흥수가 얼굴을 맞대고 웃는 사진에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이 새겨진 포스터는 흔하디 흔한 헤테로 로맨스물 같았으니까. 사전정보 없이 적당한 킬링타임용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헤테로 커플들 또는 가부장적 가족들이 있다면 꽤 당황했을 것 같다. 기대와 다르면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연재물이 아니라 극장에서 표를 사면 무를 수 없는 '영화'이기에 할 수 있.. 2024. 10. 16.
<인사이드 아웃 2> - 누구나 불안이를 품고 살잖아요 영화를 보기 전에 불안이의 목소리를 연기한 마야 호크의 인터뷰 클립을 먼저 보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불안이 그 자체라 캐릭터 연구를 할 필요도 없었다는 배우는 매 순간 자기 안에서 수십 가지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잘해야 한다는 조급함, 아직 부족하다는 자책, 실패에 관한 두려움 따위는 현대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전혀 낯설지 않은 감정들일 것이다.불안이가 등장해 기존 감정들을 유리병 안에 가두어버리고 지휘권을 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 상태로 일상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물론 그것도 모두 라일리를 위한 것이긴 하다. '더 나은 나'가 되어야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라일리 안에 있.. 2024. 7. 16.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포는 있고 두서는 없는 감상문 영화 보기 전엔 솔직히 별로 기대를 안 했다. 일단 제목이 너무 계몽적인 인상을 줬고, 내용도 많이 난해하지 않을까 했다. 요즘 극장에서 자주 졸았던 터라 이번에도 졸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진짜... 하나도 안 졸렸고, 보면서 점점 와, 그냥 너무 재밌다! 하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에는 반딧불의 묘가 떠올랐고, 그 다음에는 원령공주, 그 다음에는 하울도 조금 연상됐고... 전체적으로는 센과 치히로와 유사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예측할 수 없이 휙휙 바뀌는 전개가 너무 흥미진진했고,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과 환상의 세계가, 공들여 그린 그림으로 보여지는 표현들이 아름다웠다. 큰 화면으로 보는 지브리는 정말 예쁘구나. 지금까지 노트북으로 봤던 모든 지브리 다 극장에서 보고 싶다... 2023. 10. 26.
<다섯 번째 흉추> - 불확정, 미지, 생명, 공포 2023.08.04. 에무시네마 별빛 영화제2002년 겨울의 어느 날, 한 연인이 이사를 하며 방에 들여둔 매트리스.매트리스에는 연인의 시간이 쌓이고 먼지와 음식물과 더러운 것들도 쌓이고 그러다 곰팡이가 피어난다.그러던 어느 날 연인이 헤어진다. 여자가 저주처럼 읊조리는 '죽어'라는 말을, 매트리스 곰팡이 속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배운다.그 '무언가'는 "죽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인간의 척추뼈를 뽑아 자신의 몸에 넣는다.흉측하고 위험하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 '무언가'는 이렇게 공포물의 괴물처럼 나타난다.다만 여타 공포물과 다른 점은, 이 영화는 '괴물'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괴물'의 삶을 따라간다는 것이다.아무도 '무언가'를 반기지는 않지만, 매트리스는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는 .. 2023. 8. 8.
<엑시트> - 청년들의 현실 재난 영화 엑시트(2019) 장르: 코미디, 재난, 액션 감독: 이상근 주연: 조정석(이용남 역), 윤아(정의주 역) 길을 감춰버리는 안개 같은 유독가스. 그 가스로 뒤덮인 도시에서 가족들을 먼저 대피시키며 용남은 이렇게 외친다. "금방 따라갈게!" 성대한 칠순 잔치를 치르는 부모님, 잘 나가는 사촌, 승진이 빠른 처형, 아직 어린 사촌 동생들. 그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용남은 누나의 말대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처지다. 그러니까 용남의 상황을 고려하면, 금방 따라가겠다는 그의 말은 지금은 보잘것없고 남들보다 뒤처진 처지지만 곧 그들과 함께 어울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인이 되겠다는 취업준비생의 절박한 외침으로도 들리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 에서 용남과 의주의 재난 탈출기는 2030 청년들의 사회적.. 2022. 5. 13.
<인터스텔라> - 멸망 속에서 길을 찾는다면 인터스텔라(2014)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매튜 맥커너히(쿠퍼 역), 앤 해서웨이(브랜드 역), 마이클 케인(브랜드 교수 역), 제시카 차스테인(머피 역) ※ 스포주의 ※ 개봉 당시 극장에서 조금 졸면서 별 감흥 없이 보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제 개봉한 지 8년이 흘렀다. 다시 본 인터스텔라는 정말 재미있었다. 예전엔 별로 공감되지 않던 부분들에서 감동받는 스스로를 보며 그 사이에 나이가 들긴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1. '종족' 인간 인간이 만든, 인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매일 다른 인간들과 부대끼면서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서 인간을 생각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인류 멸망 앞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으로 돌아가는 의 인물들이 흥미로웠다. 병충해로 식량난은 점점 더 나빠질.. 2022. 4. 1.
<다이 하드> - 아마도 액션 클리셰의 원조 존 맥티어난, 다이 하드(1988)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영화구나. 그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설명되는 것 같다. 지루할 틈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가 많이 준비되어 있는데, 그 모든 게 클리셰로 느껴져서 난 살짝 지루했다. 어떤 인물이 등장하거나 상황이 시작될 때 마치 단축키처럼 그 이후의 전개가 어느 정도 예상될 때가 있는데, 그 예상이 모두 맞는 게 아니더라도 그런 전형성 자체에서 느껴지는 피로함과 실망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는 그 모든 게 클리셰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고, 그럼 진짜 심장 부여잡고 보지 않았을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힘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나머지는 방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진 않는다. 람보도 아니고, 경찰.. 2021. 7. 6.
<안나 카레리나> - 안나는 왜? 조 라이트, 안나 카레리나(2012) 키이라 나이틀리, 주드 로, 애런 존슨 안나는 왜? - 흰며들었나 - 죽어야 했을까 - 영어로 말하나 색과 연출 거의 계속 흰색 옷만 입는 브론스키 백작을 보고 친구가 농담처럼 나중에 안나도 흰며드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설마 했던 그 가설이 정답이었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흰며듦’ 이론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영화 속에는 유독 눈에 띄는 색상이 있다. 영화 초반 안나는 검은 옷을 입었고, 이 옷은 흰색으로 차려입은 브론스키 백작과 키티(당시 흰며듦 상태)와 대조를 이룬다. 그러다 떠나려는 브론스키를 붙잡으며 그와의 사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는 붉은 드레스를 입는다. 그 뒤로 그와 함께할 때는 흰색의 옷을 입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그를 떠날 때는 브론스키와의 사랑.. 2021.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