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난다, 2019
※ 스포 주의 ※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라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217
가끔 책을 추천해달라는 친구들이 있는데, 혹시 다음에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 책을 추천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 진짜, 술술 잘 읽힌다. 읽는 속도가 아주 느린 나 같은 사람도 단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정말, 정말 사랑스럽다.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철도 없이 랄라라” 계속되는 사랑이라고,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216)고 믿는 게, 너무 달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평소 흔히 접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오히려 신선하고 달콤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인간관계와 인간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우주적 관점으로 영원함을 발견하는 소설이라니. 마냥 아껴주고 싶다.
1. 영원한 감정
한아에게 경민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처럼 여겨졌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 말. 이제 그 사랑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눈앞의 존재에게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가지고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181
“널.”
그러나 한아는 마당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196-197)
변하지 않을 영원한 감정, 한아와 경민과 주영은 자신의 감정이 그렇다고 말한다. 그게 참 신기하고 솔직히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냥 믿고 싶어진다. 얼음 무당벌레가 사는 혹성도 있고, 광합성인들이 지내는 행성도 있고, 망원경으로 우주를 지켜보는 반광물 생명체도 있는데, 우주를 횡단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이 영원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하고 그냥 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확신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음, 믿는다기보다는 응원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이 소설이 그리는 항상성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고 영원한 건 아니니까.
사실 그 감정이 꼭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영원할 거라고 확신하는 그 순간의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반짝이니까, 그걸로 이미 충분한 것일지 모른다. 애초에 영원을 모르는 존재들이 어떻게 영원을 확인할 수 있겠어. 영원에 관한 어떤 확신도 결국 확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영원하다고 말하는 건 그 마음이 ‘나’ 이상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네가 내 세계가 되어서 내 세계가 끝나지 않는 한 사라질 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감각, 그 세계에 사는 한낱 나란 존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란 불가항력적인 느낌. 한아와 경민이 느끼는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우주만큼 영원했던 게 아닐까?
얼음으로 지은 치밀하고 아름다운 도시는 망원경을 통해 봐도 대단했다. 아마 실제로 본다면 가슴이 떨리는 곳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혹성은 수백만 년의 항상성을 버리고, 점점 더 따듯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항상성이란 견고해 보여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었다.
(160)
하지만 불가항력이라고 변하지 않는 건 아니니. 또 다른 불가항력이 그걸 일그러뜨릴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 사랑의 항상성이란 역설적이게도 영원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었던 아름다운 얼음 도시가 그랬듯, 항상성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기에 쉽지 않다. HAPPY EVER AFTER 이 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노력과 신중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항상성을 영원히 지키기 위해.
2. 여행하는 경민
생각해보면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경민은 꽤 비슷한 면이 있다. 외부의 것에 이끌려 밖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수 있는 강한 마음과 용기가 있다는 점이 그렇다. 둘 다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무모하거나 대담한 축에 속했다. 달랐던 것은 두 경민이 떠난 여행의 목적지였다.
한아와 지구인 경민의 관계는 한쪽이 남아 기다리고, 한쪽은 떠났다가 돌아오는 식이었다. 여행을 싫어하는 한아와 달리 지구인 경민은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는데, 한아는 그렇게 기다리는 사랑을 ‘체념’이라고 불렀다. 유리가 못마땅해하는 이 관계… 어딘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 제목이나, ‘꽃과 벌’ 같은 낡디 낡은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밖으로 떠나고 싶어 했던 경민이 결국 지구 밖 우주 끝을 향해 떠나버리면서, 한아의 체념하는 사랑은 반강제로 끝난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심지어 본인 행세를 하며 애인 곁에 있겠다는 낯선 외계인을 두고… 지구인 경민은 한아에게 정말 너무한 사람이다.
반면 한아 곁에서 지내게 된 외계인 경민은 한아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외계인 경민의 목적지는 한아의 옆자리였기 때문에, 그가 한아와 함께 있는 것은 여행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떠나지 못한 것도 아니고, 한아와 같이 여행하는 것이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137)
“그렇지만 아직 대다수는 망원경 앞에서 짝사랑만 하고 있다고! 난 우리 세대에서 유일한 존재야. 직접 너한테 온 건 내가 처음이야. 그 희소성을 좀 알아줘.”
(156)
여행은 뭘까?
테리 이글턴은 문학이란 존재론적이기보다 기능적인 용어라고 했다. 어떤 글이 문학인지 아닌지는 그 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여행도 문학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서울은 여행지고 부산은 일상지(?)고 이런 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평소에 늘 지나던 곳이라도, 먼 곳에서 온 친구에게 구경시켜줄 때나 당일치기로 휴일을 보내고자 할 때, 동네를 탐험해보고자 할 때는 여행지가 될 수 있다.
여행할 때 나는 정신과 감각이 깨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많은 것들에 집중해야 하고, 많은 것들을 최대한 기억하고 만끽하려 한다. 한아를 당연한 일상으로 여겼던 지구인 경민과 한아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여행이었던 외계인 경민의 차이는 출발지가 달랐던 영향도 무시할 순 없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마음의 차이였던 게 아닐까? 지구인 경민이 한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의 목적지는 지구 밖이었다. 그는 하늘을 볼 때 눈이 빛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별 과정에 조금 더 예의를 차렸다면 그 여정을 좀 더 열렬히 응원했으련만……. 외계인 경민의 여행에서 그가 정신과 감각을 열어두는 대상은 한아였고, 한아에게도 외계인 경민과 함께하는 시간은 여행 같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멀리서 온 친구와 우리 동네를 돌아다니면 그것도 여행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이 당연해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민의 여행이 이렇게 어떤 태도를 뜻한다면, 일상적인 시간을 많이, 오래 공유한다는 게 그 동행을 여행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3. 우주의 기준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결코 한아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9)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 문장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는 모든 일, 즉 이 어마어마한 사랑의 원인은 한아의 ‘외모’가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외모를 사랑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린 사랑, 어쩌면 정세랑 작가님이 말하고 싶었던 사랑은 그런 것과는 좀 달랐다는 것.
둘째는 지구와 우주에 대한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이 한아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한아의 미모가 그렇게 대단했나?’하고 추측했다는 것은 어쩌면 지구에서 ‘반한다’의 의미가 외모와 밀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의 기준이 곧 우주의 기준은 아니다. 외계인 경민이 언젠가 말했듯, 그의 미적 기준은 지구인들과 많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외계인’의 감정에도 일단 지구인의 잣대를 들이밀어 본다는 것.
경민은 한아만큼 한아의 신념을 사랑했다. 한아의 안에도 빛나는 암석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172)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 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102)
그래서 나는 한아가 지구를 사랑하는 환경주의자라는 설정이 재미있었다. 물론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는 이유가 전부 ‘환경주의자’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세상에서 사랑에 빠진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텍스트를 본 적이 없다. 분명한 건 경민이 한아의 그 신념에 매력을 느꼈다는 점, 그러니까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할 때 ‘외모’보다는 ‘환경주의적 신념’이 훨씬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란 점이다.
한아의 신념은 자신과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이해를 전제한다. 한아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개체들과의 연결을 이해하고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어짐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멀리, 우주 저 멀리 살던 경민에게도 닿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아의 세계는 지구였으니까, 함께 살아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이었지만, 경민의 세계는 우주였으니까 그 마음이 아주 먼 행성의 한아에게 이어지고, 그를 먼저 사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서로 너무나도 다른 존재가 사랑하는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던 건, 이들의 마음이 우주를 잇는 믿음 위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째서 외계인 경민이 한아의 신념에 관심을 갖고 한아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주의 기준에서는 전체를 아우르는 한아의 마음과 신념이 지구에서 가장 현명하고 값진 것이니까. 비록 자각하지 못했더라도 우주의 아주 많은 다양한 존재들까지도 다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니까.
『지구에서 한아뿐』은 뭔가 엄청 치밀하게 설계되어 짜릿한 느낌이 드는 종류의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있고 낙관적인 상상력 때문에 더불어 넉넉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게 되는 소설 같다.
상호 간에 신뢰가 없는 사회였다. 윗세대가 완전히 망쳐버린 것을 우리 세대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일단 한 사람의 신뢰를 얻자.
98
특히 이 소설이 특유의 낙관과 경쾌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기본적으로 선하고 사려 깊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무명가수였던 아폴로에게 다가가 진심의 응원을 전할 수 있던 주영이나, 전화 한 통의 신고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사해보고 이후에도 신경 써주는 국정원 정규, 총을 구하려는 주영이 위험에 휘말릴까 봐 직접 도와주는 호신용품 상점 주인 등. 하루에 스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은 내게 까닭 없이 선할 수도, 까닭 없이 악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선한 교류가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까닭 없는 선함을 기대하지 않게 된 건 일종의 방어기제일까? 하지만 어쩌면 정세랑 작가님은 이렇게 까닭 없이 선한 교류를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 그래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교류 방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지금 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다시는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쓸 수 없겠지만, 이 한 권이 있으니 더 먼 곳으로 가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224)라는 작가의 말을 읽고, 이렇게 다디단 이야기를 하시던 작가님이 더 먼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계실지 나도 궁금해졌다. 정세랑 작가님의 다른 소설들도 기대된다. 진짜, 궁금해서 기대가 된다.
20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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