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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모비딕Moby Dick』- 고래를 해부하며 인간을 가르치는

by 끄적고구마 2021. 5. 20.

허먼 멜빌, 『모비딕Moby Dick』, 1851
(번역서: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딕』, 작가정신, 2011)


책날개에는 허먼 멜빌을 소개하는 이런 문장이 있다.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비판적 사고, 풍부한 상징성을 작품에 담았던 그는 금세기에 와서야 단순한 해양모험담 작가가 아닌 인간과 인생에 대해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철학적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읽기 전엔 조금 의심했다. 해양모험담에 금세기 비평가/독자들이 의미 부여를 많이 해서 추켜올려주는 건 아닌지.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상징적으로 읽힐 만한 실마리가 아주 많은 책이다.

난 아직도 예전에 한 교수님이 좀 비꼬는 말투로 <모비딕> 같은 작품도 요새 같았으면 환경보호, 동물권 등으로 비판받았을 거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모비딕>의 서술자는 상당히 -비판적이지만 왠지 염세적인 것에 더 가까운 듯한- 신랄한 관점의 소유자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여성, ‘야만인’, 고래에 대한 몇몇-어쩌면 당대에는 숨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는-생각들이 눈에 걸렸다. 그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들도 뭐랄까, 실제로 어떤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다기보다 반동적으로 비판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예를 들어 퀴퀘그와 우정을 맺는 과정에서도 식인종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그럼에도 나는 미국 일반 사회인들과 다르게 식인종과도 진실한 우정을 나누지' 하는 느낌. 이런 방식으로 사회 기저에 깔린 통념을 비판하는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퀴퀘그의 고향이나 동방의 나라들을 무지하고 순수한 곳이라고 전제하며 그들에 대한 환상을 펼치기도 한다.


위대한 인간의 나라

이 책은 천천히, 느릿느릿, 거의 한 달에 걸쳐 나눠 읽었는데 고래에 관한 백과사전 같은 지식 전달은 차치하고서라도, 포경선에 대해 전혀 모르다 보니 소설 속 장면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던 중에 영화 <하트 오브 더 씨>(2015)를 봤다. 책 『모비딕』의 모티프가 된 에식스 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한다. 실제로 『모비딕』에도 ‘에식스 호’의 이야기가 짧게 언급되어 있다. 소설의 당시 배경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자료였다. 게다가 크리스 헴스워스가 주인공이었다.

<하트 오브 더 씨>를 보면 당시 포경업이 산업사회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사업이었단 것을 알 수 있다. 땅에서 기름을 얻기 전의 시대, 어둠을 밝힐 수 있던 기름은 모두 고래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밤에도 공장을 돌릴 수 있는 불빛은 생산력과 직결된다. 그러니까 19세기 미국에서 포경업이란 산업화와 더불어 빠르게 팽창하는 부, 욕망, 혁명과 진보, 인간이 자연(어둠, 바다)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철된 당대 사회의 동력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제국주의를 전세계로 운반한 것 역시 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바다로의 진출이 19세기의 표상이란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그 표상이란 자국의 부를 위해 비인간을 착취하는 것이고, 그 ‘비인간’이란 고래이기도 하고 다른 인종들이기도 했던 것이고.

‘산업혁명’이란 말은 마치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풍족해졌다는 문장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그 고도의 기술발전으로 이뤄낸 것 같은 사회가 사실은 작살과 밧줄을 실은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고래를 쫓아가고, 고래 머리에 작살을 던져 숨통을 끊고, 그 두개골 안에서 바가지로 기름을 퍼올리는 행위로 지탱되었다니, 배신감이 들 정도로 희한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인상적이었던 점 중 하나가 포경선의 고래사냥이 뭐 이렇다 할 만한 압도적인 기술적 힘을 빌려 이뤄지는 것 같지 않단 것이었다. 이렇게 작살잡이의 공격성과 팔뚝 힘, 선장과 항해사의 경험과 판단에 의존해서 얼레벌레 고래를 잡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렇게 많은 고래를 죽였다고? 막연하게 척척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인간의 원초적인 노동으로 이뤄진다. 상당히 많은 것들이 안전하고 확실한 법칙보다 관습과 경험에 의거하고 있다. 편의점 도시락에 반찬을 올려두는 게 사람의 손이듯, 반도체를 하나씩 옮기는 핀셋이 사람 손에 쥐어져 있듯.

오랫동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바다 괴물을 죽여 태양이 없을 때에도 어둠을 몰아낼 수 있게 된 ‘인간의 세상’에서 멜빌은 그 힘과 가능성을 찬양하거나 기대하는 대신 회의한다. 그가 그린 인간의 이성은 광기 속에서 더 날카로워진다. 에이해브가 이끄는 작은 사회가 파멸로 이르는 과정은 인간 역사의 은유인 양 낯설지 않다. 피쿼드 호에는 에이해브 뿐 아니라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애이해브의 광기와 피쿼드 호의 파멸을 막지 못했다. 침착하고 용감한 스타벅은 “힘깨나 가진 사람이 격분하여 눈살을 찌푸리며 위협할 때의 공포”(161)를 견디지 못했고, 측심줄에 이상이 있다고 나섰던 노인도 “하지만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머리가 백발이 되면 말다툼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특히 상대가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윗사람인 경우엔......”(617)하고 물러난다. 인간의 합리성과 고도의 문명 발달이 세계 전쟁으로 이어져 많은 이들을 허무주의에 빠뜨린 것은 더 훗날의 이야기지만, 나는 피쿼드 호가 에이해브에 동조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순응하며 나아가는 데서 그런 미래의 일을 떠올렸다. 한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따르게 되는 과정 같은 것을.

그러니까 이슈메일은-멜빌은- 무한한 진보 같은 믿음에 냉소적으로 대꾸한다. 『모비딕』의 서사와 아래 문장들을 통해.

세계 일주! 그 말에는 자랑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담겨 있지만, 그 모든 세계 일주 항해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세계를 한 바퀴 도는가? 세계 일주는 단지 숱한 위험을 겪고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우리가 안전한 출발점에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은 그동안 내내 우리 앞쪽에 있었다. (303)

우리의 삶에도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정해진 단계를 거쳐 나아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즉 유년기의 무의식적인 도취, 소년 시절의 맹신, 청춘 시절의 의심(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운명), 이어서 회의, 그다음에는 불신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만약에’를 심사숙고하는 성년기의 평정 단계에서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그 단계를 다 거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서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 ‘만약에’를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닻을 올리지 않을 마지막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지친 사람도 싫증내지 않을 세계는 어떤 황홀한 창공을 항해하고 있는가? 버려진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 숨어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아이를 낳다가 숨진 미혼모가 남긴 고아와도 같다.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비밀은 어머니의 무덤 속에 있으니, 그것을 알려면 무덤으로 가야 한다. (585-586)



성서의 이름을 가진 인간


어쩌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신에 대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비딕』도 워낙 기독교적 상징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니까 일단 대충 링크라도 달아본다. (아합, 이스마엘, 엘리야 설명에 모두 모비딕이 언급된다.)

  • 에이해브: 아합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23570&cid=50762&categoryId=50770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딕 Moby Dick』에 나오는 광기 어린 선장의 이름이 바로 에이허브(Ahab)다. 사실 요즘은 성서에 나오는 폭군 아합보다 그가 더 유명하다.

  • 이슈메일: 이스마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23649&cid=50762&categoryId=50770
문화적인 관점에서 가장 유명한 이스마엘은 허먼 멜빌의 걸작 『모비딕』에 나온다. 이 소설은 "나는 이슈마엘이라고 한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1800년대에 이 작품을 쓴 멜빌은 독자들이 성서에 익숙하므로 이슈마엘이라는 이름이 성서의 이스마엘처럼 뿌리 없는 유목민을 상징한다는 것을 즉각 알아채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 일라이저: 엘리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23597&cid=50762&categoryId=50770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서는 엘리야(일라이저)라는 사람이 작품의 화자인 이슈마일에게 에이허브 선장의 배가 침몰할 위험이 있다면서 조심하라는 경고를 한다. 그 예언은 소설의 말미에서 현실로 드러난다.

  • 요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5773&cid=58858&categoryId=58858

그 외) 레이첼 호: 라헬 등

소설의 중심인물인 에이해브가 기독교에서 반동적인 인물이란 점, 운명과 자연에 거스르는 뛰어난 인간이란 점에서 근대적 인간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서의 이름을 가진 존재면서 스스로를 “그리스 신처럼”(564) 당당하다고 말한다. (보통 성경과 대비되는 그리스 신이 등장할 때는 인본주의적인 맥락과 관련되는 것 같다.) 에이해브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앞서 언급한 포경업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과신, 자만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부정할 수만은 없는 건 비극적으로 운명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존재론적 처절함이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야말로 근대적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비극, “비천한 의식”을 지닌 개인. 타락하고 실패하는 인간상. 다만 ‘에이해브’란 개별적 인물은 악랄하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모든 선원이 목숨을 걸도록 강요하니까, 심지어 바다 한가운데서 다른 방도를 찾을 수도 없게 몰아놓고. 말그대로 폭군이다.

※ 헤겔의 “비천한 의식”
“비천한 의식은, 권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가능한 긍정적 태도인 고결성, 정직성, 우아함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경멸과 반항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비열’하고 ‘음흉’하고 ‘저열’한 태도를 보여준다. 비천한 의식은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힘의 실체, 즉 개체의 자기 정신이 완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 강제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서 이성의 간지(奸智)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자의 의식이다.”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27쪽)


그리고 『모비딕』에는 요조를 숭배하는 퀴퀘그뿐 아니라 불을 숭배하는 이교도들도 등장한다. 마치 에이해브와 계약한 악마처럼 등장해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했던 배화교도 페달라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소설에서 ‘불’의 이미지는 반복된다. 태양, 번개와 같은 하늘의 불이 있고, 대장간의 용광로나 고래 기름과 같은 지상의 불이 있다. 그리고 이는 앞선 논의와 연결하면 각각 초자연적 힘과 인간의 힘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즉 대장장이의 불이 인간이 다루는 힘이라면 번개가 내리쳐 생긴 성 엘모의 불은 신성한 힘이다. (아합과 맞선 엘리야는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호소해 바알 숭배자들을 제압했다고 한다. 어쩌면 선원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성 엘모의 불꽃이 그것의 변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작살이 번개의 불꽃으로 타오를 때 단숨에 그 신성한(그래서 불길한) 불꽃을 꺼버린다. 그 작살, 에이해브가 모비딕을 위해 만든 작살은 이교도들의 피와 대장장이의 불로 벼려진 것이다.

태양, 고래, 배화교도는 수로를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무엇에 의지해 길을 찾을 것인가? 여기에 에이해브는 단호히 하늘의 뜻을 살피고 따르는 건 그만두겠다고 한다. 그가 바람이 부는 대로 배를 맡기지 않고 역풍에 맞서 전진하라고 하는 것도 해를 따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사분의를 부수며 말한다. “두 번 다시 너에게 내 지상의 길을 안내받지 않겠다.”(595)

오, 태양이여! 인간의 시선은 본래 이 지구의 수평선과 같은 높이에 있다.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창공만 쳐다보게 할 작정이었다면 인간의 눈은 정수리에 뚫려 있을 것이다. (594-595)

나는 그대의 불가사의한 위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힘이 나를 무조건 지배하려 들면, 나는 지진 같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저항하겠다. 의인화한 사물 한가운데, 바로 여기에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 서 있다. 보잘것없는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여왕과도 같은 인격이 내 안에 살면서 왕권을 느낀다. (602)

스타벅, 이리 가까이 오게. 내 옆에 서게. 내가 인간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게. 바다나 하늘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그게 낫겠어. 신을 우러러보는 것보다 그게 낫겠어. (644)




다시, 처음의 책날개 작가 소개로 돌아가면,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비판적 사고, 풍부한 상징성을 작품에 담았던 그는 금세기에 와서야 단순한 해양모험담 작가가 아닌 인간과 인생에 대해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철학적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젠 무슨 소린지 좀 알 것 같다.


두서없는 여담들

  • 「옮긴이의 덧붙임」에서는 ‘피쿼드’란 이름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비딕을 백인의 비유로, 피쿼드 호를 미국 원주민 사회로 해석할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피쿼드족은 미국의 북동부, 코네티컷 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식민자들과 치열하게 싸웠고, 1637년에 백인 전투부대의 기습으로 전멸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백인과 항쟁하여 전멸한 최초의 부족이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몰살한 ‘민족 말살’이었다. 영구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백인 기독교들이 도착한 1620년부터 불과 17년째, 백인 기독교도들이 신세계에서 거둔 ‘승리’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멸한 부족의 이름을 부여받은 포경선이 복수를 위해 흰 고래를 추적한다면, 흰 고래는 백인의 상징인가. (711)

  •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이 장황한 책은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처음에는 이슈메일이라는 서술자가 등장해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듯하더니, 때로는 희곡처럼 갑판 위의 상황이 묘사되기도 하고, 아예 고래에 대한 논문을 쓰는 것 같은 장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서술자가 ‘오오 인간들이여!’하며 독자에게 말을 걸 때가 많고. 여러모로 텍스트 안에서 독자의 존재가 비교적 가시적으로 상정된 듯하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서술자와 작가를 분리하려는 편인데, 『모비딕』에서는 그 구분이 더 흐릿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그 때문인 듯하다. 서술자가 쓰는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풍기면서 독자를 의식하(는 걸 드러내)니까 이 책을 사이에 두고 작가의 말을 듣고 있는 기분이다. 계속 쓰는 주체인 이슈메일을 책의 저자 허먼 멜빌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서술자가 고래나 포경업에 대한 지식을 전달할 때도 진지하게 본인의 지식을 기록하고 있는 허먼 멜빌을 떠올리다가 하지만 이건 픽션인데 사실 일부 혹은 전체를 (현재 과학 지식과 다른 건 차치하고) 자신이 아는 것과 일부러 달리 적어놨을 가능성도 없진 않나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 그리고 반드시 희곡 같은 형식이 아니더라도 대사들이 대체로 좀 연극적이란 느낌이 들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연상됐는데, 「옮긴이의 덧붙임」에 따르면 실제로 멜빌은 『모비딕』 창작 이전에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으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예전에 문학동네에서 책 속 인물과 매칭해주는 성격검사 같은 걸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모비딕』의 스타벅이 나왔다. 피쿼드 호의 일등항해사이자 ‘스타벅스’란 이름의 유래가 된 인물. 근데 진짜 스타벅스는 왜 로고는 세이렌이면서 이름은 스타벅에서 따왔을까? 세이렌은 배를 좌초시키려는 존재고 스타벅은 (비록 실패했지만) 집에 돌아가려는 이성적 목적을 잃지 않는 신중한 항해사인데. 각자의 의미는 알지만 둘이 함께할 때의 의미도 있을까 궁금하네. 여튼 스타벅의 용기에 관한 부분이 좋아서 남겨둔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 그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한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늘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포경업에서 용기란 쇠고기나 빵처럼 반드시 배에 갖추어야 하고 어리석게 낭비하면 안 되는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160-161)

  • 마지막으로 번역이 좋아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점도 남겨야겠다.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가 삐걱거리는 우리말로 옮겨져 있었다면 중간에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 덕분에 그런 종류의 괴로움은 겪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여러분이 철학자라면, 포경 보트에 앉아 있어도 작살이 아니라 부지깽이를 옆에 놓고 난롯가에 앉아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