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 카이거,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1993)
※ 스포 주의
▶ 두지/청데이 (장국영)
이 강렬하게 매운 비극 서사의 주인공. 데이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많은 인물들이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그 중에서도 데이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경극’이고, 데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경극에 동화되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데이는 샬로와 달리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철저히 분리하지 못한다. 무대에 서기 위해 그의 ‘진짜’ 손가락을 하나 절단해야 했던 그 시작이 잘 보여주듯, 데이가 무대에 서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그 역할에 맞춰 깎아가는 것이다. 걸음걸이, 행동, 목소리 등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아편을 하는 데이와 고운 목소리를 내는 우희가 공존할 수 없다면, 남성인 데이와 여성인 우희가 공존할 수 없다면, 데이는 우희를 위해 자신을 지운다.
스승에게 매를 맞을 때, 여성곡 ‘사범’을 부를 때, 재판정에서 일본군에게 경극 공연을 강요받았다고 거짓으로 진술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누군가에겐 그저 말만 그렇다고 하면 되는 일들이겠지만, 데이는 빈말을 내뱉지 못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곧 자기 자신이어야만 했던 듯하다.
두지는 다지증으로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기 위해 손가락을 잘리고, 극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했다. 데이의 비극에서 키워드는 ‘버림받음’이다. 그의 삶은 버림받음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스승의 묵인 속에서 후원자에게 유린당하고, 동료와 관중에게서 외면당하고, 샬로에게 배신당한다. 그래서 모든 게 파국으로 치닫던 문화 대혁명 시기 자아비판 장면에서 그는 “결국 모두가 나를 배신했어!”라고 외친다.
장국영은 연기 천재가 분명하다. 장국영의 연기 덕분에 청데이의 비극적인 가련함이 극대화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누가 장국영의 청데이를 보고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평생 함께 노래하면 안 될까. 일분 일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잖아.”
“너 정말 경극에 빠졌구나. 경극 속에선 함께 하지만 현실에선 그게 아니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시투/단샬로 (장풍의)
시투는 쇼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투의 쇼맨십은 그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샤오라이즈의 도주로 관객들이 화가 났을 때, 시투는 벽돌 깨기로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는 스승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맞아도 쌉니다!”를 몇 번이고 외치고, 두지의 실수에 실망한 후원자를 붙잡기 위해 화려한 연습 동작으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며 직접 담뱃대로 두지의 실수를 벌하는 ‘퍼포먼스’를 할 줄 안다. 궁지에 처한 주샨을 돕기 위해 즉석에서 장난스럽게 약혼을 하고 이마로 주전자를 깨는 것도 마찬가지다. 샬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방법을 알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꾸며내어 보여주는 데 능하다.
이것이 데이와 샬로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차이, 둘의 삶이 결코 화해할 수 없던 이유다. 입을 꾹 다물고 매를 맞는 두지에게 시투는 “어서 맞아도 싸다고 해!”라고 한다. 영원히 함께 노래하자는 데이에게 샬로는 이미 ‘반평생’이나 함께 했다고 말한다. 데이에게 샬로는 삶을 함께할 파트너인데, 샬로에게 데이는 공연을 함께하는 파트너(=직장동료)인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데이가 원하는 것을 샬로는 알고 있단 점이다. 허허실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샬로지만, 사실은 복잡한 관계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로, 실제로는 더 복잡한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샬로는 데이의 마음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이를 답답해하는 것 같다. 장 내관의 집에 또 칼을 찾으러 갔냐고 물었으면서, 정작 데이가 혼인식에 칼을 들고 찾아왔을 때는 모르는 척 선을 긋는다. “난 가짜 패왕 할 테니, 너는 진짜 우희나 해.”라는 말도, 너무 잔인한 말이지만, 정말 데이를 몰랐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데이가 죽음을 선택하자 “두지…”라고 속삭이며 미소를 짓는 것 역시, 샬로가 영화 속에서 표면적으로 보인 것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임을 드러내 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샬로의 생각처럼 그의 삶이 철저하게 양분(현실의 자신 – 보여주는 모습)되어 있을까? 샬로의 비극은 보여주기 위한 그의 말과 행동이 늘 그렇게 재미로, 거짓으로 휘발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장난스러웠던 주샨과의 약혼은 실제 결혼이 되었고, 공산당과 싸울 수도 있다는 너스레는 이후 그를 심문 대상으로 만든다. ‘이 칼만 있었다면 나는 진짜 황제가 되고, 너는 황비가 되었을 거야.’ 시투는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을지 몰라도, 두지에게 그 말은 오랜 시간 그 칼을 찾아다닐 만큼, 칼을 위해 원대인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만큼 중요했다. 자아비판에서 주샨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대답도 단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공산당원이 듣고 싶어 한 말을 한 것뿐인지 모르겠으나, 주샨에게는 삶을 포기할 이유가 되었다. 샬로가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했던 말과 행동들은 그의 주변 인물을 통해 족쇄가 되어 돌아온다. 그에게 패왕은 단지 가짜 역할일 뿐이지만, 결국 그는 패왕으로서 자아비판의 장에 끌려간다. 보여주는 가짜와 현실의 진짜를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겨왔던 샬로였다. 하지만 그가 패왕의 모습으로 패왕임을 비난받고 주샨을 부정하고 데이를 잃는 것은 그의 생각과 달리 그의 ‘진짜’ 삶과 ‘가짜’ 모습이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 주샨 (공리)
주요 등장인물 중에 제일 똑부러지고 영특하고 전략적이다. ‘매춘부’라고 홀대받으면서도 할 말은 당당하게 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는 패닉에 빠지는 대신 직접 타개책을 마련해온다. 진짜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주샨이 나오는 장면마다 생각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샬로와의 약혼을 혼인으로 진전시킨 것도, 샬로가 일본군에게 잡혀갔을 때나 데이가 수감되어 있을 때 그들을 구하기 위해 협상을 하던 것도, 경극 빼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샬로가 귀뚜라미에 빠져있을 때(중국에서는 귀뚜라미 시합이 오락거리로 유행했다고 한다.) 그를 다시 붙든 것도 모두 주샨의 강단 있는 행동이었다.
주샨은 평범하고 안전하게 사는 삶을 바랐다. 그래서 샬로에게도 계속 경극을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자고 말한다. 샬로가 제 분을 못 이겼다가 위험해질까 봐 옆에서 지켜보며 경고한다. 현대극과 경극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우산을 전해주며 말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우희 분장을 마친 데이가 무대에 올라갈 수 없자 데이와 함께 자리를 뜨려는 샬로를 가로막으면서, 그의 안위를 지키려 노력한다. 격변하는 사회에서 샬로와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주샨에게 자기표현의 신념을 지키는 데이는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이 데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 건지, 데이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이 가까이 있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주샨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데, 그가 술집을 떠날 때 주인이 저주처럼 했던 말이 비극의 키가 된다. “매춘부 팔자 어디 가겠어?”
모든 돈과 장신구, 신발을 벗어던지고 샬로의 부인이 되기로 결심한 날 이래로 주샨은 늘 샬로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자신이 가장 아끼고 지켜왔던 남편이 자신을 ‘매춘부’라고 하며 그 시간과 사랑을 부정한 것이다. 주샨은 술집에 온갖 패물과 신발을 벗어두고 온 그날 ‘매춘부’의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을 부정하는 샬로의 말을 통해 술집 밖에서의 삶까지 모두 ‘매춘부’의 삶이 되어버렸다. 주샨이 자결하며 혼례복을 입고 신발을 벗어둔 것은, 술집에 신발을 벗어두고 나와 샬로와 혼인하던 때처럼 ‘매춘부 팔자’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샬로의 아내로 19년을 살고도 벗어나지 못하는 낙인이라면, 그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삶 자체를 벗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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