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재춘 언니>, 2020, 97min
174회 독립영화 쇼케이스
2021년 5월 24일 오후 7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이수정 감독과 홍은애 평론가가 함께하는 GV 시간이 있었다. 흑백에서 컬러로의 전환이 어떤 의미인지, ‘재춘 언니’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지, 임재춘이란 인물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뽑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왜 함께 니체를 읽기로 했는지 같은 질문들이 나왔다.
흑백
투쟁이 끝나기까지의 시간을 모두 흑백으로 담은 것은 ‘그 시간이 아저씨들에게 유예기간 같은 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독님은 그 시간이 반드시 흑백의 암울한 기간이라고 생각하시지만은 않는 듯했지만, 적어도 투쟁하시는 노동자분들께서는 가까워지지 않는 목표를 지키며 고루하게 계속하는 대치가 끝없는 유보처럼 느껴졌을 수 있겠다. ‘유예기간’이란 말이 흑백과 상당히 잘 어울려서 이해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흑백이라 좋았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좋다고 느꼈던 지점들이 모두 바람직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흑백의 화면이 아카이빙 된 영상자료 느낌을 줘서 좋았다. 결과가 어느 정도로 만족스러웠든 2019년 4월 사측과의 합의를 통해 종료된 투쟁이란 점에서, 13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 끝을 정식으로 맞이했단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흑백 필터가 그 시간을 기록하고 갈무리하는 느낌이라 좋았다.
아마 새빨간 색이었을 고추가 화면 가득히 잡혔을 때는 흑백의 통일성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장면들의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왠지 흑백이 더 대단하고 의젓(?)하게 느껴졌고...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흑백이 지워버린 생활감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13년 동안 지속된 투쟁의 기록을 한편의 영화로 편안히 감상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도 영화가 흑백의 필터를 통해 그 생활감을 많이 걸러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난 흑백을 더 편안하게 느끼면서 좋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혈색 도는 얼굴과 투쟁 현장과 그들이 입은 빨간 조끼가 색깔로 생생히 다가왔으면 아마 좀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난 그 현실의 시간과 사건들에 대해 무지했고 무관심했고, 그래서 마음이 안 좋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거리감을 느끼니까.
재춘'언니'
제목 ‘재춘 언니’는 노동운동의 지휘자 같은 지도적 단어가 아니라, 여성 연대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임재춘이란 인물의 성품을 잘 드러내는 단어를 찾다가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처음 이 영화에 관심이 생긴 것도 사실 제목 영향이 컸는데, 생각보다 감독님이 제목에서 보여주시려 했던 그런 면모들이 영화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쇼케이스에서 나눠준 자료집을 참고해보면, 재춘의 ‘언니’적 면모란 농성천막에서 주방을 담당하며 함께 밥을 먹으며(먹이며)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할을 맡아 하얀 원피스에 화관을 쓴 이미지에서 기인한 듯하다. 뭐라 판단하기에도 너무 단편적이다. 현장에서 직접 함께 지낸 감독님이 느끼신 건 아마 그 이상의 복합적인 인격이었겠지만, 내가 영화를 통해 여성과의 연대를 느꼈던 부분은 별로 없었다. 투쟁 노동자들은 감독님이 부르시는 호칭처럼 ‘아저씨들’이었고, 문화예술 활동을 함께 하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영화의 중심은 아니었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내가 뭔가를 크게 느낄 수 없었던 거 같다.
소수자의 말
<재춘언니>에 관심이 갔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이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냈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 자체도 바로 그 연대의 일환이고. 영화 속에서 노동자들은 셰익스피어의 <햄릿>, 카프카의 <법 앞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다. 2014년 7월에 공연한 <법 앞에서>를 연기하던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2014년은 콜텍의 고법 파기환송심이 패소한 해였다. 콜텍 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시골 사람과 지금은 들여보낼 수 없다는 문지기의 대화가 들려왔다. <법 앞에서>가 이렇게 현실적인 텍스트였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빌린 텍스트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그들의 언어 같았다. 소수적인 문학이 실제로 현실의 소수자들에게 힘을 얻고 힘을 주는 모습을 본 것 같다. 문화예술의 생명력이 무엇인지 언뜻 본 것 같았다.
<재춘언니>에는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삽입하는 스타일의 내래이션이 없다. 대신 재춘이 창작한 시가 삽입된다. 과하게 친절하지 않은 영화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너무 긴 시간의 이야기라 천천히 전부 꼭꼭 씹어 먹여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영화는 조각들을 담고 이어붙이는 데 집중하고, 공백을 채우는 언어는 재춘의 것이다. ‘유예기간’ 같은 흑백의 시간에도 콜텍 노동자들은 계속 말하고 활동했다. 그 시간은 비어있거나 없지 않았다. 재춘은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계속 시를 쓰고, 농성일기를 썼다. 어떤 시는 노래가 되어 행진할 때 불리기도 했다.
견디거나 살거나
13년. 그렇게 오랜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재춘은 두 딸에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이제 그만하라고 하는 딸들에게 미안하다고. 돈도 없고, 이길 거란 확신도 없고, 법정에서도 졌는데 합의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수 있던 동력이 궁금했다. 영화 후반에는 수개월 내로 투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건배하던 투쟁 초반 노동자들의 모습이 잠깐 등장한다. 영화 후반쯤 되면 재춘은 시작할 때보다 더 늙은 모습이라, 그 짧은 영상 속 젊은 모습이 좀 낯설고 슬프게 느껴졌다. 막 투쟁을 시작했던 그때, 그 길은 13년짜리라고 누가 알려줬더라면 콜텍 노동자들은 그래도 그 길을 택했을까? 나는 아니었을 것 같다. 13년을 견딘 건 오히려 처음부터 13년을 버틸 각오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닐지. ‘한 걸음만 더’ 하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듯, 단지 오늘의 투쟁이 지금 해야 할 일, 지금의 생활이기 때문에 계속했던 게 아닐까. 김혜진 「아웃포커스」에서 회사 앞 1인 시위가 자신의 일이니까 성실해야 한다며 매일 출근하던 ‘엄마’처럼, 콜텍 노동자들에게도 그 13년이 공허한 기다림의 시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농성장에서의 하루하루가 그들의 일이자 생활이었으니까. 그 시간이 비어있던 게 아니고 삶으로 채워져 있었기에 힘들어도 걸을 수 있었고 걷다 보니 13년이 되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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