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욱 옮김,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1939), 민음사, 2008
- 케이시, 신의 뜻보다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기로 한 목사.
- 톰, 살인죄로 복역하다가 가석방된 채로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된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하는 불의를 못 참는 성격. 힘을 합쳐야 한다는 케이시의 말을 새기고 가족들과 헤어진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보인다.
- 어머니, 집과 땅을 잃고 온 가족이 트럭에 올라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궁핍한 생활이 시작되자 불안한 가족들을 다독이고 이끌어주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가족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쓰지만, 더이상 이전과 같은 단란한 가족 개념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깨닫고 슬퍼한다.
- 로저샨, 임신한 몸으로 길을 떠나지만 어느샌가 토니도 떠나버리고 빈곤한 생활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 결국 죽은 아이를 낳는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젖을 준다.
총 30장으로 구성된 『분노의 포도』는 12-14장을 제외하고 홀수장은 당시 사회나 사람들에 대한 글이, 짝수장은 조드 가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가난함과 무력함. 내 것을 빼앗기는데 빼앗는 사람도 일당을 받는 노동자일 뿐, 그러도록 시킨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회사’라고 한다. 작은 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큰 회사에 그것을 빼앗기고 일용직 노동자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일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진다. 조드 일가 역시 지나야 했던 66번 국도(시카고~산타모니카)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모두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살아온 터전을 잃고 온 가족의 미래를 걸고 가본 적 없는 먼길을 처음 떠나야만 했던 당시 소작농과 소지주들의 불안함과 막막함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져 금세 압도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소작농에서 임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올라오고 도시 빈민 문제가 발생한다는 내용은 사회시간에 배운 것이지만, 긴 소설로 읽자니 그 암담하고 참혹한 현실이 훨씬 생생해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도 내겐 좀 충격이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 미국은 늘 강하고 부유한 쪽이었기 때문에 산업화와 도시화의 문제가 미국에서도 이렇게 심각하게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계적 경향이었다는 걸 막연히 아는 것과 고향에서 쫓겨나듯 떠나 ‘오키’라는 이주민 멸칭으로 불리며 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타국의 인물들의 삶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미국인들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혐오하기 전에는 그 역할이 고스란히 자국 내 이주민들 몫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기분이 좀 이상했다. 『분노의 포도』 속 조드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큰 농장에서 복숭아나 오렌지, 목화솜을 수확하는 것. 지금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가 하고 있는 일. 혐오는 그 존재에 대한 게 아니라, 상황과 조건, 역할에 수반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대상만 바꿔가며 계속된다.
살벌한 취업난 속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닐 때 대가족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책 속에서도 어머니의 노력에도 계속 가족이 흩어지게 되는 것도 하루, 한 사람씩 계약하는 노동의 ‘정량’ 때문 아닐까? 삶의 터전이 있고 어제도, 내일도 그곳을 가꾸고 살아갈 때 해야 하는 노동과는 완전 다른 형태의 노동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전에는 대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면,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유용한 가족형태였다면, 임노동자로 살아가야 할 때 대가족은 이전처럼 기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경제와 노동에 따라 가족의 형태와 기능이 달라진다.
작은 돈은 큰 자본에 흡수되고, 그 작은 돈을 잃은 사람들은 큰 자본에 복무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고, 시장 경제의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들이 있고, 과잉생산되는 것들, 빈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장치와 일자리,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생계를 위해 그 돈을 사용해버리면 내 하루에는 잉여가 없지만 내가 생계를 위해 일하고 소비한 무언가를 통해 아마 누군가는 이윤을 남겼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꼭 책 속의 문제, 1930년대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배경과 시대, 정도와 형식만 달리 해서. 조드가 사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이 유지하고 있는 법칙은 같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분노의 포도는? 패배감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피어오르는 게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이기만 하다면, 분노의 힘만 남아있다면 끝난 것은 아니라고, 스타인벡은 말한다. 분노의 포도가 익어가고 있다면서. 하지만 수확기는 언제인가? 분노의 포도는 어떻게 수확해야 하나? 책은 그것까지 보여주진 않는다.
이 책이 출판된 지 80년이 넘었지만 분노의 포도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때로 분노하지만, 80년 전보다 훨씬 더 이 법칙에 익숙해져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이야기한다면 상황은 이 책이 묘사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큰돈은 아니라도 열심히 일하고 아끼면 돈을 조금씩 모을 수 있고, 취업난은 지금도 심각하지만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아 보이진 않는다. 물론, 내 눈에 보이는 한에서 그런 것이지만. 분노의 포도가 더이상 여물지 않는 건 어느 정도 살 만한 균형을 찾았기 때문일까? 존 스타인벡이 말하는 분노는 부를 독차지하는 존재 혹은 그 법칙 자체를 향하는 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기준을 지키기 위해, 고용주와 보다 나은 조건에서 거래하고 타협할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일까? 더 나은 계약 기준으로 합의서를 쓰고자 하는 노동운동처럼. 아마도 지금까지 수확된 수많은 분노의 포도 덕분에 이 세상 일부는 어제보다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노의 포도는 없는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수확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힘을 내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으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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