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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핀천『제49호 품목의 경매』- 폐쇄된 사회를 흐트러트리는 에디파의 혼란물

by 끄적고구마 2021. 6. 10.

 

 

김성곤 옮김, 토머스 핀천, 49호 품목의 경매(1966), 민음사, 2007

 

 

작년 수업 시간에 다룬 책이었는데, 그때 사두고 읽지 못해서 이번에 드디어 읽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난해하고 읽기 어려운 소설인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질질 끌지 말고 읽어버리자고 다짐했고, 그래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독서 경험이었지만 재미를 발견한 지점들도 있었다. 책장을 덮고서는 작년 수업시간 필기와 다른 학우들이 남겼던 한줄평을 읽고 왔다. 역시 나만 어려운 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민음사에서 출판한 이 책을 일단 끝까지 읽어보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라는 감상만 남지는 않는다. 작품 해설이 정말 친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소설을 이렇게나 깔끔하고 단정하게 설명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려운 만큼 더 그런 해설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그 해설이 오늘의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니까.


트리스테로의 표식

 

약음기가 달린 나팔과 W.A.S.T.E, 태평한 세상 속 비밀스럽게 숨겨진 듯한 이런 표식들이 가리키는 트리스테로라는 비밀스러운 조직망은 보르헤스의 틀뢴을 떠올리게 했다.(책을 다 읽고 수업 필기를 보니 교수님도 그렇게 언급하셨다. + 해설에서는 에코가 자신의 소설이 보르헤스와 핀천에 빚지고 말한 적 있다고 한다. 둘을 같은 결로 겹쳐 읽을 여지는 충분한 듯.)

 

트리스테로의 표식이 직관적으로 상징하는 바도 재미있다. 약음기가 달린 나팔. We Await Silent Tristero’s Empire. 이것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트리스테로의 특징은 조용함이다. 트리스테로는 상속받지 못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사극 같은 걸 봐도 상속자가 나머지 경쟁자를 다 죽이는 일은 빈번하지 않나. 그럴 때 상속받을 힘이 없는 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흔히 아주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다. 조용히 살 테니까 제발 살려줘! 하며 도망가는 힘없는 왕위 계승권자처럼. 힘을 상속받을 잠재적 가능성(나팔)은 있지만,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약음기) 힘없는 존재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표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패권을 가질 잠재력도 지니고 있기에 그들의 숨죽임은 마냥 도망치며 사는 게 아니라 트리스테로의 제국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에디파

 

“나는 미합중국의 정규 우편제도를 이용합니다. 다른 제도를 이용하라고 배운 적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호소했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적이 되고 싶지도 않고요.” (5장, 145)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이란 사실이다. 평범한 특징이지만 토머스 핀천이 남성 작가란 점에서 더 의도적으로 보이는 설정이다. 주인공이 여성이어야 했던 이유는 이 책이 탐색하는 게 기존 질서의 환기 혹은 전복 가능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디메오스 바로의 <지구의 덮개를 수놓으며>에서 여성들은 탑 안에서 지구를 덮는 태피스트리를 직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탑의 중앙에는 로브를 쓰고 그들을 지켜보는 관리인 같은 존재가 있다. 에디파는 스스로 세상을 디자인하고 지휘하지 못하지만, 관리인의 의도대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탑 안의 여성이다. 탑 안에 속했지만 탑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갖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에 탑의 규칙과는 다른, 숨겨져 있는 낯선 질서와 가능성을 탐지할 수 있고 그것을 억압하지 않을 존재로 적격인 것이다. 에디파는 자신을 라푼젤에 빗대 탑에서 구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에디파가 탑 밖을 알게 한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인도가 아닌 그 자신의 호기심과 추적이었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는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가 더 이상 결함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파멸은 단지 한 체제의 균열이지, 절대적인 무언가의 절멸은 아니니까.

 

 


맥스웰의 수호정령

 

그 수호정령은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공기 분자들 사이에 앉아 빠른 분자와 느린 분자를 분류할 수 있다. 빠른 분자는 느린 분자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지니고 있고 그것들을 한곳에 집중시키면 그곳의 온도는 올라간다. 이때 상자 속의 고온 영역과 저온 영역 사이의 온도 차이를 이용하면 열로 움직이는 엔진을 가동시킬 수 있다. 그런데 수호정령은 다만 앉아서 분류만 할 뿐 그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끝없는 운동을 발생시켜 구성분자의 차이가 없어지면 운동이 중지되고, 그 체계는 죽게 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4장, 111)

 

맥스웰의 수호정령’(맥스웰의 도깨비)은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반할 가능성을 상상할 때 가정되는 존재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열평형상태에 있는 물체가 저절로 온도차가 나도록 하는 운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맥스웰의 수호정령은 각 분자의 속도를 모두 알고, 평균보다 빠른 분자를 한쪽으로, 느린 분자를 다른 한쪽으로 분류함으로써 물체의 엔트로피를 낮춘다.

이 소설에서 맥스웰의 수호정령 사고실험이 은유하는 것은 모두 균질해 보이는 사회 속 개인들도 사실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다는 것, 즉 평균 속도가 같은 물체여도 각 분자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체계가 힘을 얻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춰줄 맥스웰의 수호정령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 그렇지 않고 말 그대로 모두가 똑같은 사회가 되었을 때는 운동이 중지되고 죽은 체계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두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모든 게 아주 같지는 않을 때, 아주 미세한 속도차라도 있을 때가 바로 체계가 죽어버리기 직전의 상황이자 맥스웰의 수호정령이 체계를 살릴 수 있는 기회다. 모든 분자의 속도가 같다면 수호정령의 분류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맥스웰의 수호정령 같은 존재란 통일된 것 같은 체계 속에서 민감하게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 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감성이 예민한 사람”(112)이다. 경직되어 가는 미국 사회에도 수호정령이 나타난다면, 미국, 요요다인, 정규 우편제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이면에서 트리스테로의 흔적을 탐지하는 에디파 같은 사람일 것이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고, 진실과 변화는 계속 유보되지만, 그래서 에디파가 맥스웰의 수호정령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애당초 그 사고실험이 미국 사회에 통할지는 알 수 없지만, 트리스테로를 추적하는 에디파는 맥스웰의 수호정령처럼 차이를 감지하고 분류하는 자리, 그 지점을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혼란물

 

이 책이 읽기 어려운 이유가 뭘까? 이 난해함에 번역의 지분이 얼마나 될지 좀 궁금했다. 문장의 가독성은 차치하고, 일단 문화번역이 어렵다는 점에서 문턱이 좀 더 높아진 것 같긴 하다. 난 터퍼웨어가 유명한 밀폐용기고 그래서 터퍼웨어 파티가 폐쇄적인 체제 어쩌고의 비유인 것도 알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지명과 인명이 나름의 상징적 의미를 숨긴 채 등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읽으면서 그런 걸 알 수 없으니 재미가 반감되고 복잡한 고유명사의 향연 속에 좀 어지러워지는 것 같다. 문화적인 감식안은 결국 문화 자본의 독점과 훈련의 문제라고 했던 부르디외가 생각난다. 나는 문화적 까막눈이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 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모호함(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지?)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해설에 따르면 숨 막히게 이분법적었던 당시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탄생한 소설이라는 이 책은, 트리스테로와 에디파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 기존의 분류 체계와 규범을 뒤흔들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착각인지의 이분법적 판단 또한 유보하고 숨기려 한다. 그래서 끝까지 트리스테로의 정체도, 에디파의 추리가 현실인지 환각인지도 명쾌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현실일 법한 단서들과 환각일 법한 정황들을 혼란스럽게 배치해둘 뿐이다.

 

이제는 그녀도 이런 신호를 인식할 수 있었다. 마치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냄새나 색깔, 자신을 찌르는 듯한 전조를 느끼듯이. 나중에 기억 나는 것은 단지 그 신호뿐, 정말이지 쓸데없는 그 영속적인 전조뿐, 실제 발작 중에 드러난 진실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에디파는 이 모든 것의 마지막에(만일 마지막이 찾아온다면) 그녀 역시 수많은 실마리들과 공공연한 사실들, 어떤 암시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중요한 진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 아닌지 걱정했다. 그 진실들은 그녀의 기억이 붙잡으려 할 때마다 어쩐지 너무나 투명해 보였고,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오면 언제나 과잉노출로 인한 공백을 남기며 그 자신의 메시지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해 버리는 것 같았다. 민들레주로 입술을 축이는 순간, 그녀는 이런 순간이 지금껏 얼마나 많이 찾아왔다가 지나가 버렸으며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4장, 123-124)

 

명백한 것들 뒤에는 또 다른 형태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른다. 에디파가 진정한 편집증의 빙글빙글 도는 희열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진짜 트리스테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유산으로 물려받은 미국의 외형 뒤에 트리스테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사실은 그저 미국만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만일 그저 미국만이 있을 뿐이라면, 트리스테로와 관계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소외된 사람으로서 편집증 속으로 주저 없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6장,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