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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외『벌새』(arte, 2019)에서 발췌한 문장들

by 끄적고구마 2021. 5. 8.

김보라 쓰고 엮음 외,『벌새』, arte, 2019

 

처음 편집했을 때는 2시간 40분 분량이었던 영화가 2시간 18분짜리로 개봉했다고 한다. 시나리오집에는 삭제된 분량의 대사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물들의 비하인드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재밌었다. 시나리오와 함께 실린 글들도 좋았다. <벌새>에 대해 더 알고 생각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하는 책 김보라 쓰고 엮음,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 그리고 앨리슨 벡델의 『벌새』, arte, 2019에서 발췌한 문장들.

 


최은영, 「그때의 은희들에게」

고통은 언제 고통이 되나. 누군가의 시선으로, 공감으로 고통은 고통이 된다.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싸우지 좀 마’라는 말을 들어야 할 때, 은희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철없는 칭얼거림이 된다. ‘싸우지 좀 마’라는 말에는 ‘오빠라면 여동생을 때릴 수 있다’라는 승인이, ‘여자애는 남자가 때려도 참아야 한다’라는 주문이 들어 있다. 이런 사회에서 자란 많은 여성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진위를 의심한다. 210-211

 

한국 사회에는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가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극복’하고 강해지는 서사를 환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상처는 언제나 사람에게 좋은가. 사람으로 살면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처가 있겠지만, 받지 않아도 될 상처는 최대한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나. 상처를 미화하는 문화는 가해자에게 언제나 얼마간의 정당성을 주는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그런 거야. 정말 그런가. 인간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사랑은 상처가 상처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인간을 상처 속에 매몰되어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무감한 사람으로 변하도록 두지 않는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과하며 사랑받아 성장했다. 함부로 대우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213-214


 

 

남다은, 「영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다만 영화의 이러한 결단에 의해 영지라는 인물이 끝내 시대의 희생양, 사회적 모순의 체현자로 환원된다는 점, 영화가 한국 사회라는 짐을 이 개인에게만 과도하게 실어 두어 그가 사후적으로 상징과 추상으로 읽힐 위험 또한 있다는 점 정도는 언급해 두고 싶다. 그리하여 그가 우울할 때마다 본다는 신비로운 손이나 삶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그의 목소리보다도 세심하게 생의 어둠과 빛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버티던 얼굴의 힘, 즉 한 세계의 대체 불가능한 표정 또한 무력하게 물러나고 만다는 인상도 덧붙이려 한다. 영화의 결말에 흐르던 영지의 음성은 이렇게 끝난다. “그때 만나면 다 이야기해 줄게.” 우리는 어떤 얼굴을, 어떤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잃은, 아니 빼앗긴 것일까. 224-225

 


김원영, 「붕괴하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이별한다는 것」

사회학자 김홍중의 분류를 빌리면, 국가가 공식적으로 생산하는 (중국몽이나 아메리칸드림 같은) 공몽公夢 특정한 장field이나 조직체에서 생성되는 공몽共夢, 가족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생산되는 사몽私夢이 그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4년의 한국 사회는, 말하자면 세 종류의 꿈들이 분화되지 않고 일치했던 시기이며, 동시에 그 꿈들의 공모가 깨지던 때다. (중략) ‘한강의 기적’이라는 국가의 꿈은 곧 학력과 학벌을 통한 계급 상승 혹은 재생산의 최전선으로서 학교가 지닌 꿈이었고, 모든 가정의 꿈이었다. 서울 강남은 그 몽상의 끝점이었다. 227-228

사회 전체가 생존과 지위 상승을 놓고 서로 투쟁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 질서에 충실히 복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불안이라는 정서가 근간에 놓인다. (중략) 집합적인 꿈에 자신을 투신하는 이들이 그 꿈에서 탈락할까 불안해할 때, 애초에 그 꿈에서 배제된 이들, 그 꿈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은 우울하다. 229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는 한국 사회의 집합적인 몽상이 깨져나가는 상징적 사건이었고, 그 시작이었다. (중략) 법원은 성수대교 건설과 관리 등에 관여한 이들을 업무상과실치사 등의 공범으로 처벌했는데, 이는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아님에도 공범으로 처벌한 최초의 판결이었다. 이 판결에 대한 이론적인 반론이 많았다. 하지만 법원은 우리 개개인이 어떤 집합적 질서에 가담해 있는 자신을 각성하지 못할 때, 그것이 고의로 누군가를 해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231-232

 


 

정희진, 「지금, 여기의 프리퀄 <벌새>」

이 영화의 역사성은 1994년 가족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통증과 폭력의 일상을 그려 냈다는 데 있다. 239

한국의 가족 문화는 부부 중심이 아니다. 실제 ‘정상가족’은 해산되었거나 동거하는 이들은 ‘스카이 캐슬’을 꿈꾸며, 스트레스 받고, 불안에 휩쓸리면서, 자녀의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물론 앞서 말했든 부모들의 꿈은 가능하지 않고,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자신이 들러리, ‘샌드백’임을 알고 있다. 241

사랑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랑이란 그 상대가 반려동물이든, 반려자든, 친구든 사랑하는 상대보다 사랑의 주체들이 ‘사랑하는’ 자기를 사랑할 뿐이다. 자기방어를 위해 상대를 물화物化하고, 자기 상태의 투사 대상으로 삼는 문화가 일반화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의미도 모른다. 이 비윤리적 관계가 폭력으로 끝날 때, ‘사랑받던’ 사람은 “버려졌다”고 느낀다. 242

신자유주의 시대는 극단적인 개인의 시대지만, (인권 개념에서) 개인은 그 안에서도 다른 누구로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존재여야 한다. <벌새>는 그렇지 않은 현실을 보고한다. 243

사랑에 필요한 것은 영원한 약속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을 관계를 끝낼 때,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 이 말은 언제나 명언이다. 사랑은 윤리적인 사람만이 시도할 수 있는 행위다. 243

뻔뻔스러움의 시대에, 우울은 윤리적 능력이다. 본인의 우울을 타인에게 폭력으로 전가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244-245

 


김보라 + 앨리슨 벡델, 「여성, 서사, 창작에 대해」

 

AB: 삶 자체에 이미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대리석 덩어리 안에 이미 조각이 있다는 (미켈란젤로의) 표현과도 비슷하다. 창조가 아니다. 이야기는 그냥 거기에 있고, 나는 그저 이야기가 아닌 부분을 들어내면 되는 거다. <벌새>를 보면서 항상 좋아하던 히치콕의 말이 생각났다. “드라마란 인생에서 재미없는 부분을 잘라 낸 것에 다름 아니다”라는. 그런데 당신은 그 ‘재미없는 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예를 들어 가족들이 2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그냥 앉아서 밥을 먹는 장면 같은…. 당신은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그냥 담았다. 그게 정말 대단하다. 298-299

BK: 고작 며칠 만난 것으로는 누구도 제대로 알 수는 없다. 당신을 두 번 만났지만,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에게는 수많은 역사와 당신만의 서재가 있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당신은 나쁜 날을 보내기도 하고 좋은 날을 보내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뀔 거다. 누구에 대해서도 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가한다. 나는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도, 나 자신조차도 잘 알지 못한다. 그냥 알기 위해 노력할 분이다. 그게 다다. 이제 대화를 마쳐도 되겠나? 310


영화 <벌새> 리뷰:

[영화] - <벌새> - 가장 작은 새가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벌새> - 가장 작은 새가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김보라, <벌새>(2018) ​ ​ <벌새>의 첫인상: 은희의 시선 ​ ​처음 <벌새>를 봤을 때, 나는 왠지 소설이나 그림 같은 좀 더 정적인 매체의 예술이 떠올랐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고민하며

sweetwritingpotato.tistory.com

 

 

+) 영화 장면은 아니지만 모두 활짝 웃는 귀한 투샷

김새벽 배우님(영지 역)과 박지후 배우님(은희 역)

 

++) 김보라 감독님 인터뷰!

"그냥 단독자로 있으려고 해요."

http://naver.me/xDAx62ID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여러분이 각자 인생의 단독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BY 독서신문]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마음을 곡진히 흔드는 영화를 보고 극장 밖을 나오면서, 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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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