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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흑설탕 캔디」- 빨간 망토 할머니의 흑설탕 캔디

by 끄적고구마 2021. 5. 8.

백수린, 흑설탕 캔디」,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 2020

 

빨간 망토 할머니의 흑설탕 캔디

- 백수린, 흑설탕 캔디(2020)

 

 

할머니, 파리에 가다

백육십 센티미터의 키에 사십구 킬로그램 내외의 체중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 가지런한 백발의 단발머리를 고수하던 나의 할머니. 할머니가 동년배의 다른 할머니들과 다르다는 점은 어린 시절 나를 늘 우쭐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일본어에 매우 능숙했고, 계란말이와 계란찜을 일본식으로 달짝지근하게 만들었으며, <에델바이스>를 영어로 부를 줄 알았다. (176)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 연주에 능숙하고 영어와 일본어를 구사하는 가지런한 백단발의 할머니. 다른 자매들과 달리 부모를 설득해 대학에 진학하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175)이란 소리를 듣지만, 결국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결혼해서 대학을 그만둬야 했던 사람. 이렇게 자신의 취미와 흥미가 확실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별한 이후에도 자식들과 함께 사는 것을 거부했지만, 동시에 가족들이 자신에게 부과하는 의무를 결국엔 외면할 수도 없는 사람으로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의 가족들과 함께 낯선 땅, 파리로 향했다.

그곳에서 어린 아이들은 해마다 프랑스어 실력이 늘고 현지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하지만, 할머니는 몇 해가 지나도록 간단한 인사말과 한국에서 왔습니다’ ‘프랑스어는 하지 못합니다정도의 프랑스어를 할 수 있을 뿐, 혼자 지하철을 탈 수도 없고 누군가와 대화할 수도 없다. 아이들이 집 밖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수록, 난실은 홀로 더 외로운 날들을 보내게 된다.

 


 

난실, 사랑, 피아노

그러나 답답하고 고립된 나날들 속에서 난실은 감전이 된 것처럼”(185) 놀랍고 가슴 뛰는 어느 봄날을 발견한다. 아파트 안뜰을 지나던 중, 브뤼니에 집의 열린 창문으로 피아노 연주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곡은 리스트의 <사랑의 꿈> 3A플랫 장조. 그 순간을 시작으로 난실은 꿈같은 사랑의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날 이후 난실은 에게 쓰지 않는 워크맨을 빌려 클래식 채널을 찾아 듣기 시작하고, 브뤼니에의 피아노 연주를 넋 놓고 감상하다가 그가 ‘Bonjour’하는 말을 걸면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른다고 답한 뒤 급하게 자리를 피하기를 반복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브뤼니에를 눈여겨 본다. 프랑스어를 할 수 없는 난실과 영어를 모르는 브뤼니에는 부족한 조각들로 퍼즐을 맞추듯 사전의 단어들로 대화를 한다. 그렇게, 드디어 난실은 브뤼니에에게 피아노를 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 -. 차갑고 매끄러운 건반. 그저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렀을 뿐인데 어린 시절 교회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았을 때 같은 경이롭고 황홀한 느낌이 할머니의 몸안 가장 깊은 곳에서 피어오른다. (193)

 

슈만의 곡을 연주하면서, 난실은 여고 시절 짝사랑했던 유부남 음악 교사를 떠올린다. 난실에게 사랑은 아마 이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 음악 교사와 교환하던 편지들. 악보 사이에 끼워 몰래 주고받던. 밤마다 그녀를 불면으로 이끌었던 것은 윤심덕과 김우진, 슈만과 클라라 같은 연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고, 자신에겐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194)

 

난실이 갈망하는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는 사랑과 음악이다. 그리고 여고 시절 음악 교사 때도, 브뤼니에와의 인연에서도 난실에게 사랑과 음악은 함께 찾아왔다. 평론가 황예인은 백수린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의 작은 세계가 확장되리라는 기대에서 오는 희열감”(270)이 보인다고 했는데, 난실의 경우에는 그 기대와 희열이 음악과 사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고독을 해소해주거나 타인과 하나가 되는 마법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둘은 사전을 통해 더듬더듬 소통할 수 있을 뿐이고, 때때로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은빛 털의 남자를 바라보며 난실은 자신이 브뤼니에를 영원히 이해 못할 것이란 사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을 영원히 이해 못할 거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낯선 타지에서의 외롭고 심심한 일상에 음악과 사랑이 자리하면서, 난실은 꿈과 기대가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비록 어떤 갈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못한다고 해도, 기대가 있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는 분명 다른 세계일 것이다.

난실의 삶에 일어난 이 아름다운 변화는 비밀스럽고 번거로운 기적이라 더 소중하고 놀라워 보인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할머니와 프랑스어만 할 줄 아는 프랑스인 남자가 피아노 선율로 교감하고, 한불/불한 사전으로 단어를 짚어가며 소통하고 있다고 누가 쉽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 ‘는 할머니의 네 번째 기일이 될 때까지 둘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별로 관심도 없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그럴 때면,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아 챈 브뤼니에 씨가 우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할머니에게 내가 대신 전해주길 바라고 한 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브뤼니에 씨와 헤어질 때마다 할머니가 나에게 뭐라고 하더냐?”라고 묻는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했던 말들을 최대한 간략하게 요약하거나- “우리더러 베트남 사람이냬”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는- “몰라. 그냥 다 쓸데없는 이야기” -나의 세계로 되돌아갔다. (188-189)

 

는 자신의 좁은 세계 바로 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주인공들의 서사에 본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엑스트라 마냥 자신도 모르는 새 그들의 세계에 잠시 끼어들었다가 무관심하게 빠져나오곤 했다. ‘에게 난실은 매일 집에 있는 할머니였을 뿐일 테니. 그렇지만 난실의 특별한 서사는 의 시야와 관심과 상관없이 전개되고 있었고, 나는 그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함이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빨간 망토의 흑요석

상대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삶이 기대와 다를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 탑을 쌓아가는 난실과 브뤼니에의 태도란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갈색 각설탕의 천진하고도 황홀한 달콤함은 난실에게 삶을 갈망하고 기대하게 하는 것,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는 자신만의 것이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엄마의 심부름으로 떡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여러 고개를 넘어 이웃 마을로 가야 하는 빨간 망토의 소녀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호랑이를 만난다. “꼬마야, 꼬마야, 네가 가진 떡을 다오.” 빨간 망토의 소녀는 호랑이가 요구하는 대로 처음엔 떡을 주고, 그다음엔 바구니를 주고, 망토를 벗어 주고, 구두까지 벗어 주지만 결국엔 호랑이에게 집어삼켜진다. (중략)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호랑이에게 통째로 잡아먹힌 어린 소녀는 아무도 몰래 주먹 속에 꼭 쥐고 감춰두었던 아주 작은 흑요석 조각으로 호랑이의 배를 가르고 밖으로 나온다. (177-178)

 

엄마의 심부름으로 떠난 길 위에서 호랑이에게 모든 것을 주고도 잡아먹히는 소녀 이야기는 가족의 뜻대로 살아오며 자신의 것들을 하나씩 포기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다. 난실은 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부모의 뜻대로, 평생 지루해할 남자와 선을 봐 결혼”(176)하여 대학과 꿈을 포기했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매주 예배를 보러 갈 교회”,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을 들으러 가는 구민대학”, “한 달에 한 번씩 참석하는 여고 동창 모임”(178) 같은 편안하고 익숙한 일상을 포기했다. 그렇게 난실은 자신의 자유와 시간과 노력을 가족에게 헌납했으나, 자식들은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들먹이며 난실을 빚쟁이처럼 당당하게 비난”(199)해온다.

그러나 난실은 이게 사실은 모든 걸 주고도 잡아먹히고마는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호랑이 뱃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남은 아주 용감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178)라고 말한다. 그리고 난실의 이야기에서 호랑이 배를 가르고 나올 수 있는 흑요석은 흑설탕의 달콤함이다. 우아한 모자를 쓴 양장점의 여자 손님이 울고 있는 어린 난실에게 쥐여준 흑설탕 캔디는 난실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무외의 것들, 삶에 대한 욕망과 꿈, 기대 같은 달콤한 것들을 일깨워준 것이다.

할머니, 손을 펴봐.” 나는 할머니에게 떼를 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내가 울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에 차서.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203-204)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은 가 비로소 난실을 가족 역할인 할머니가 아니라 빼앗을 수 없는 그만의 것을 움켜쥔 낯선 타인으로 인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마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의 아기가 엄마의 낯선 아름다움에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일기장을 읽으면서, 할머니가 파리에서 살았던 비밀스럽고 놀라운 날들을 상상하며 는 손주라는 호랑이탈을 쓰고도 할머니에게서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할머니에게 삶의 중심이 손주가 아니며 할머니가 손주에게도 양보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건 놀라야 할 일은 아니다. 당연한, 아니 당연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통속적인 가족 역할 문법에 익숙해져 있는 손주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호랑이 뱃속에 들어간 난실이 살 수 있던 이유가 사랑하는 손자들을 향한 할머니의 헌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끝까지 놓지 않았던 혼자만의 달콤한 꿈과 기대, 즐거움이었다는 게.

 

 

 


 

어쩌다가 백수린 작가님 강연을 듣게 되어서 친애하고, 친애하는 여름의 빌라를 읽었다. 친애하고, 친애하는도 좋았지만, 소설집 여름의 빌라가 나는 특히 좋았다. 홀랑 지나가버려 아쉽기만 한 올해지만, 그 마지막을 이 책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이 책의 조용하고 섬세한 시선이 마음에 든다. 그 시선이 담아내는 이야기에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울림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고요한 사건도 좋았고,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흑설탕 캔디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작가님께도 이 소설이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고 한다. 작가님은 박난실이라는 인물이 사랑스러워서 이 작품을 쓰면서 유독 행복했다고 하셨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도 그랬다. 나는 아마 난실의 사랑스러움에 반한 것 같다.

모든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이 소설집 속에서 흑설탕 캔디가 가장 진하게 남는 이유는 이 소설이 가장 설레는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좋은 때는 지났다, 끝났다, 설렘과 꿈 대신 권태와 허물어짐만이 남았다는 말들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이 나에겐 관심이 없고 내게 바라는 게 나의 행복이나 욕망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뿐일 때에도 나는 살아있고 가슴 뛸 수 있고 아름다운 날을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난실이 천진한 달콤함을 맛보며 대책 없이 설렐 때, 나도 함께 설렜다.

 

 

 

2020.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