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홀』, 문학과지성사, 2019
가족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잔인해. 어쨌든 서서히 죽이는 거잖아?”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잔인하지 않냐고 묻는 엄마에게 “그래도 『미나』에 비하면...”이라고 답했지만, 사실 엄마 말대로 참 잔인한 소설이다. 김사과작가의 『미나』는 한 사회의 무의식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느낌이라면 『홀』은 너무 현실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잔인하다. 현실에서 사지를 움직일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이 누워 어떤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해 생을 사는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들, 나는 아마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채로 현실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가장 잔인하다.
오기와 장모의 관계는 일단 ‘가족’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들은 오기와 아내가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면 더이상 가족이 아니었을 관계이기도 하다. 여행 전까지는 어색하게 아내나 장인을 사이에 두고 교류하다가, 아내가 죽고 나서야 오히려 가장 끈끈하게 서로에게 유일하고 필요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가족’이라는 언뜻 가장 친밀해보이는 이름으로 묶여있긴 하지만, 실상은 남보다도 못한 것 같은, 이 이상한 관계.
장모가 오기를 깊은 구덩이 속으로 몰아가는 이 잔인한 이야기가 끝까지 도달할 수 있던 이유는 어쩌면 이 가족의 관계성, 선의와 헌신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오기의 삶이 전적으로 장모를 의존하게 되었을 때, 장모가 오기에게 위험한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은 게 아닌가? 아니, 제이를 비롯한 오기의 몇몇 친구들은 이상함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알게 되었어도 ‘가족’이란 지위를 지닌 사람에게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엔 제한이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너무나 가능한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도 아마 현실에서의 ‘가족’ 관계가 갖는 (법적/인식적) 우선권? 면제권? 뭐 그런 것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복수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나는 내가 예전에 소설쓰기 수업을 들을 때 썼던 소설이 생각났다. 그건 오기를 향한 장모의 살의가 복수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을 피워서 자신의 딸을 괴롭게 한 ‘오입쟁이’ 사위에 대해, 그가 건강하고 권위 있는 대학교수일 때가 아니라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고 오로지 자신의 도움에만 의존해 연명하고 있을 때 행하는 복수. 내가 쓴 소설은 가정폭력을 저지른 아버지와 딸 사이 힘의 관계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역전되는 형태였다. 복수극을 써내려가듯 소설을 썼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이 서사의 바탕에 깔린 잠재적인 욕망이 내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복수는 꼭 약한(약해진) 상대에게만 가능한가? 같은 대상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가 육체적으로 강하고 위협적일 때 맞서는 것과, 그가 노화 또는 사고 등으로 쇠약한 상태에 놓였을 때 그를 억압하는 것을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썼던 소설이 어쩌면 노인혐오적으로 읽힐 수 있듯, 장애로 인해 힘이 역전된 상황에서 행하는 복수 역시, 통쾌하기보다 끔찍하단 느낌이 먼저 드는 서사인 것 같다. 인물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바뀌었을 뿐,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약자에게 폭력적인 힘이 가해진다는 공식 자체는 똑같기 때문이다.
장애
이전의 오기에게 ‘장애’는 오래전의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고 돌아온 재향군인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출생 당시 염색체의 의문스러운 조합에 의해서거나 유전자에 남은 가문의 멍에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을 뜻하는 말이었다. 물론 오기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오기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이었다.
- 36쪽
『홀』에서 힘의 역전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오기가 전적으로 장모의 힘을 빌려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전에 ‘장애인’의 반대말은 ‘예비장애인’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비장애인’이란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신체적 ‘장애’가 육체의 어떤 컨디션을 기능적인 관점에서 일컫는 말이라면, 내 육체가 나의 혹은 일반의 기대에 못 미치게 기능하는 순간이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오지 않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예비장애인’이란 말은 꽤 적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평소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큰 장애로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고를 당하기 전 오기처럼 ‘장애’를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여기고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가볍게 떠난 여행에서 (오기의 아내처럼) 돌아오지 못하거나, (오기처럼) 심각한 부상을 입을 가능성은 늘 있다. 오늘 내 일상이 무사히 흘러가는 일은 당연하지 않고, 단지 안일한 기대를 사실인 양 믿는 것뿐.
때문에, 눈 깜짝할 순간 벌어진 사고 이후 오기가 이전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쟁이가 더 넓은 벽면을 뒤덮어버리듯이, 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성장한다는 오기 아내의 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고 퍼져 삶의 공간을 장악해버리는 불길한 이미지는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스산한 느낌을 내뿜으며 성장하는 그것은 ‘생명’, ‘삶’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 과정 자체가 삶이고 성장인 동시에 죽음이다.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그것은 오기의 인생이다.
어쩌면 이런 인생의 갑작스러움과 변덕스러움이 이 소설이 가장 힘있게 전하려고 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삶은 한순간에 뒤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그럴 작정을 하고 있던 인생을 오기는 남몰래 돕고 있었던 걸까.
- 28쪽
2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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