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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 Believe It Or Not

by 끄적고구마 2021. 7. 5.

 

이안,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둘 이상을 믿는다는 것

 

파이는 힌두교도인 동시에 기독교도이고 이슬람교도이기도 하다. 하느님 유일신만을 섬기고, 그 외 다른 것들을 믿는 것은 우상숭배로 금기시하는 기독교적 사고관이 익숙한 나로서는 다신교적 사고관에서 출발한 개방적인 신앙의 자세가 흥미로웠다. 파이의 종교관에서 신은, 암흑 같은 세상에 내려온 한 줄기 빛이라기보단 어디에나 있는 원주율 같은 것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원이 모두 같은 원주율을 가지고 있듯, 다양한 종교도 신의 이름이나 교리는 다를지언정 모순되지는 않는다고, 파이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전부 다 믿는 것은 전부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파이 아버지의 말은 파이의 신앙을 설명하진 못한다. 그건 진리는 오로지 하나의 표현만을 갖는다는 아버지의 믿음이 전제된 말이기 때문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여러 겹의 이야기가 있다. 아니, 여러 가지로 해독될 가능성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게,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파이가 이야기하는 두 가지 설 하나는 지금까지 영화로 보여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환상적인 공존, 다른 하나는 앞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해석했을 때 도출되는 인간들의 살육과 생존, 고독한 표류 이다. 파이의 이야기는 벵골 호랑이와 함께 믿기 힘든 일들을 겪은 소년의 이야기일 수도, 혹은 그 소년이 장기간 표류로 몸과 마음이 지쳐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일 수도, 보트 위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소년이 그것을 환상적인 상징으로 치환해 말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난파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인물이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를 표류한단 점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하트 오브 더 씨>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 영화의 고통스럽고 처참한 표류 생존 과정이 <라이프 오브 파이>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미와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두 영화에서 그들이 견딘 건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파이의 두 가지 이야기 (혹은 두 영화)만큼 다를 수 있다는 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두 이야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른 그림이지만 같은 것이고, 하나의 이야기 속엔 다른 한쪽이 아른거리고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둘 중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들어요?”라는 질문과 이제 그건 당신 이야기니까.”라는 말은 어차피 내가 들은 이야기를 규정짓는 것은 내 믿음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신의 초월적인 힘과 운명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이나 결국 나의 믿음이란 것을. 이 영화는 초자연적인 신의 문제를 인간이 사유하는 사고방식에 맞춰 논리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대신 그것을 불가사의한 그대로 두며 당신이 사고하는-합리적-방식이 유일한 것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신의 불가사의함과 자신의 선택적 믿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하나를 믿는다는 것이 곧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하나의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신을 믿는 것이 다른 종교를 배척할 이유가 되지 않고 과학을 이해하는 것이 초자연적 존재를 부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멋진 문학 텍스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환상적인 방식 그 자체로 살아서 사람들의 믿음을 받는 동시에 상징적으로 풍부하게 해석되는, 상징에 흡착되지 않으며 다양한 방식의 독해를 가능하게 하는 텍스트니까. 게다가 그게 꼭 신화뿐만은 아니란 점 역시도 파이의 종교관과 유사하다. (텍스트 세계의 끝없는 확장력...) 하나의 텍스트를 여러 방식으로 읽는 건 사실 어디서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용의자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심리학적 분석으로 의중을 알아내려 한다든지. 꿈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든지 정신분석학적 상징으로 욕망을 읽어내려 한다든지 등등.

 

파이의 이름들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이름이 많다. 하나의 존재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 역시 하나의 본질이 여러 방식으로 표현/독해되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과 관련된다.

이름이 왜 파이일까? 먹는 파이일까 원주율 파이일까? 신기하긴 했지만 작가가 농담처럼 아버지가 수학자셨냐고 했을 때 그럴 수 있지 원주율이란 이름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이름인걸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수학이 아니라 수영을 좋아하셨고, 파이의 이름은 원래 프랑스의 유명한 수영장의 이름을 딴 피신 몰리토 파텔이었다. 아버지로 인해 피신 몰리토였던 이름은, 친구들에 의해 쉬를 싼다는 의미의 피싱(pissing)’이 되었다가, 놀림에서 벗어나고 싶은 파이 본인의 의지로 파이(pi)’가 되었다. 처음부터 나는 그저 주어진 이름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파이로 각인시키기 위해 원주율 소수점 몇백짜리까지 기꺼이 암기하는 소년의 의지와 집념이 놀라웠다. 설마 본인의 노력으로 쟁취했을 줄이야.

한편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원래 이름은 Thirsty(목마름)라고 한다. 잡힐 때 물을 마시고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서류에 착오가 있어 Thirsty를 잡아 온 사냥꾼의 이름 리처드 파커가 호랑이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다.

파이에게 주어진 이름 피신 몰리토는 고급 수영장, 즉 인간들의 유흥과 편리를 위해 잘 계획되고 관리된 물(자연)이다. 이는 자연이나 종교보다 서양 의학과 과학에 신뢰를 보이는 파이 아버지의 가치관과 관련된다. 물을 관리하는 수영장과 마찬가지로 파이의 가족들은 동물을 관리하는 동물원, 식물을 관리하는 식물원을 운영한다. 자연을 관리하는 인간의 힘, 피신 몰리토는 인간 문명에 대한 신뢰와 경의를 담고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파이의 친구들에 의해 이 이름은 피싱(pissing)’이라는 동물적 욕구에 대한 놀림거리로 전락한다.

소변 보기(pissing)와 목마름(thirsty)은 동물의 원초적 욕구다. 파이 아버지는 파이에게 호랑이(=리처드 파커=Thirsty)와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리처드 파커가 파이 자신의 투영이라고 생각해본다면 파이 아버지가 거부하고 억압하려 한 것은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일지도 모른다. 이성으로 본성을 억누르고 다스려야 한다는 근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이 호랑이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선언된 것이다. 하지만 긴 여정을 마친 파이는 리처드 파커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 말은 긴 표류의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은 인간 이성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강한 본능 때문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파이가 성당에서 만난 신부는 그에게 “You must be Thirsty.”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데, 이와 관련해 ‘thirsty’라는 인간동물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세상의 진리와 신을 구하는 갈증으로 확장된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신과 우주를 포괄하는 관점에서 목마름, 갈증, 갈망은 인간동물이라는 유한한 존재 자체를 표상하는 언어일지 모른다. 동물적인 몸을 지니고, 동물적인 욕구를 지니고, 유한한 존재 속에서 무한한 세상과 진리를 갈망하는 구도자. 그래서 파이는 thirsty이며 동시에 pi이다.

파이(pi)라는 이름은 입속에 우주를 품은 크리슈나의 이미지와 상응한다. 파이(pi)는 하나의 문자인 동시에 끝나지 않는 숫자의 나열이기도 하다. 작은 인간의 몸이지만 그 안에 무한한 우주를 지닌 크리슈나와 마찬가지로 파이(pi)라는 이름은 물리적인 상식을 비틀어버리는 역설적인 불가사의함이며 대우주를 품은 소우주이다.

즉 파이의 세 가지 이름, 피신 몰리토 피싱 파이는 각각 인간의 이성적, 동물적, 신비(신앙)적 성질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파이는 이 모든 이름을 지닌 존재인 동시에, ‘파이(pi)’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원주율의 소수점 아래 숫자들을 외우며 자신이 pi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그 숫자는 끝이 없으므로 파이 되기는 완결되지 못한다- 존재다.

 

3D로 다시 개봉해주세요.

 

하지만 사실 이 영화에서 특기할 점은 영상미와 풍부한 표현력인데, 나는 2012년에 이 영화를 보지 않은 탓에 십 년 전 기술력이 이미 이 정도였다는 걸 몰랐다. 영화를 보는 동안 스크린 크기가 달라지는 때가 몇 번 있었는데 갑자기 화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황새치 떼가 막 날아다닐 때도 그랬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3D로 상영되었고 황새치 장면에서 스크린 크기를 줄임으로써 표현하려 했던 것은 3D로 돌출되었을 새치였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영화의 마지막에 파이가 두 번째 이야기를 할 때는 병원에 앉아있는 파이가 울면서 말하는 장면이 그대로 담겼다. 그때 나는 몇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하나는 파이 앞에 앉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조사원들은 첫 번째 이야기(리차드 파커와 미어캣 섬, 황새치 떼가 있는)도 이런 장면을 보며 단지 파이의 말을 통해서만 들었겠지, 지금 내가 느끼는 것보다 첫 번째 이야기가 훨씬 더 못 미덥겠다 하는 생각. 또 하나는 긴 시간 직접 영상으로 구현해 보여준 첫 번째 이야기와 파이의 언어로 전달되는 두 번째 이야기의 차이에 대한 생각. 시간의 순서를 따라 전개되는 영화를 볼 때 관객은 ‘(디제시스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의 전달방식에서 드러나듯 결국 <라이프 오브 파이> 자체도 선택적 의도와 배치를 이용해 잘 짜인 텍스트란 것. 그리고 아름다운 영상, 그 시각적 자극이 그 자체로 얼마나 호소적인 힘이 있는지를 생각했다.

 

3D로 영화관에서 재개봉하면 좋겠다. 노트북으로 본 게 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