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런 아로노프스키, 블랙스완(2010)
호러 or 스릴러?
나는 호러 영화를 싫어한다. 호러는 서사적 전개가 긴박하고 소름 돋는 것과는 좀 다르다. 난 서스펜스는 좋은데, 시청각적 자극으로 겁주는 건 싫다. 그래서 공포 영화는 원래 안 본다. <블랙스완>도 포스터가 공포 영화 같아 보여서 원래는 볼 생각도 없었는데, 막상 찾아보니 드라마, 스릴러 장르로 포함되길래 괜찮겠지 생각하며 보게 되었다.
하, 정말... 너무 힘들었다. 넷플파티로 친구들과 같이 보던 중만 아니었으면 포기했을 거다. 대체 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도 호러 영화의 맥으로 포함하면서 <블랙스완>(2010)은 호러라고 부르지 않는 거지? 그 모든 섬뜩한 이미지들이 ‘환각’이라는 자연(과학)적 현상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어서? 스릴러와 호러 장르의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블랙스완>이 호러 장르에 포함되지 않을 이유를 모르겠다. “캐릭터가 맞닥뜨린 공포와 이를 훔쳐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민” 이거 완전 <블랙스완> 그 자체인데... 게다가 “주인공이 ‘마지막 순간에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것(last minute rescue)’”란 스릴러 방법론의 결말이랑도 안 맞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속았어...
▶‘호러’의 사전적 의미: 영화, 책, 게임 등의 장르 특성 중 하나로 공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됨.
호러영화(horror film)는 관객에게 공포와 경악이라는 부정적인 정서를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장르를 말한다. 호러영화의 관심은 인류가 태곳적부터 지니고 있는 원초적 두려움이며, 동시에 인간 본연의 변태적이고 잔인한 성향이다. 호러영화는 악몽에 나타나는 망령을 마주하고픈 욕망을 집단적으로 실현하는 제례의식(cult)이다. 호러영화의 관객은 캐릭터가 맞닥뜨린 공포와 이를 훔쳐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민 사이의 변증법적 유희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추구한다.
호러영화를 구성하는 핵심 내러티브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귀신이나 늑대인간 혹은 뱀파이어 등에 관한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이야기이고, 둘째는 연쇄살인마나 살인짐승과 관련해 실존했던 혹은 있을 법한 이야기다.
▶‘스릴러’의 사전적 의미: 관객이나 독자에게 공포감이나 흥취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만든 연극, 영화나 소설 따위.
스릴러(thriller)는 긴장감을 유발하고 지속시키는 내러티브 공식을 가진 영화를 총칭한다. 스릴러는 범죄 사건을 중심으로 한 의혹과 반전의 중층적인 서사 구조를 의미하는 매우 폭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스릴러는 독자적인 장르라기보다는 내러티브 진행을 위한 방법론의 일종이다.
스릴러 방법론의 핵심은 '누가 이 범죄를 저질렀나?(Who has done it?)', 즉 후더닛(whodunit) 구조다. 후더닛 구조는 미스터리한 범죄와 용의자에 대한 관객의 가설을 유도하지만, 제시되는 주제와는 오히려 느슨한 관계를 가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릴러는 구체적인 주제를 가진 타 장르와 결합하게 되며, 여기서 다양한 하위 범주가 파생된다. 스릴러의 하위 범주는 주제에 따라 심리 스릴러(psychological thriller), 에로틱 스릴러(erotic thriller), 사법 스릴러(legal thriller), 스파이 스릴러(spy thriller), 경찰·탐정 스릴러(police/detective thriller), 의학 스릴러(medical thriller) 등으로 구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릴러 (장르영화, 2015. 3. 15., 배상준)
그래도 개인적으로 보기 힘들었던 것 말고는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했다. 니나(나탈리 포트만)가 점점 심한 광기에 휩싸이는 과정이 감정적으로 치밀하게, 영화적으로 기괴하게 전개되어서 나도 같이 너무 무섭고 미치는 거 같고 그랬다. 한 인물의 내면을 매개로 현실적인 상황과 환상적인 현상이 뒤섞이는 게 강렬하고 흡입력 있어서 (괴로웠지만) 좋았다. 니나의 욕망은 완벽한 백조 퀸이 되고 싶다는 것인데 그 강한 욕망이 있는 이상 니나는 스스로 극 중 배역에 동화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극 중 배역들(백조, 흑조, 왕자, 악마 등)이 니나와 주변 인물들에게 오버랩된다. 니나의 시선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애초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니나의 시선 바깥을 보여주지 않으니 어디까지가 니나의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분별하기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니나를 강박적으로 몰아붙이는 엄마가 실제로 그렇게 정신적 학대 수준으로 니나를 대하고 있는 것인지, 완벽해야 한다는 니나의 강박이 엄마에게 덧씌워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제대로 분별하고 사고할 수 없는 혼란과 광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영화고, 그래서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공포와 강박과 완벽
니나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으로 드러난다. 벽에 걸린 그림들의 눈동자가 모두 니나를 따라 움직인다든지, 니나를 지켜보는 동상이 있다든지, 방에 자기 혼자인 줄 알았는데 바로 옆에 엄마가 있었다든지, 화장실에서 나오니 누군가 욕을 거울에 써놓은 상태라든지, 심지어는 거울 속 자기 자신이 타인처럼 나를 응시한다. 누군가 지켜본다는 것은 니나에게 두 가지 의미의 공포인데, 하나는 니나가 그 전 공연의 주연 발레리나였던 베스 맥킨타이어(위노나 라이더)의 자리를 동경하며 그의 물건을 훔치는 방식으로 자신이 그를 대체하길 바라왔다는 점에서, 베스가 그의 것(물건, 배역)을 탐내던 니나에 의해 대체되었듯, 니나 자신도 다른 누군가의 목표(혹은 표적)이며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것이란 불안이다. 즉 니나를 지켜보는 시선은 니나의 것을 탐내며 니나가 실수하거나 타락하거나 실패하기를 기다리는 경쟁자들(적, 흑조)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공포다. 동시에 그 시선들은 무대 위에서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니나의 공연 중 감각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니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감상하는 관객들의 시선이 극과 현실의 경계가 뒤섞여버린 니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니나가 극과 현실을 분리해서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시선은 더 집요하게 니나를 따라다니고, 무대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니나의 강박은 더욱 심해져 가고, 그럴수록 니나는 스스로를 배역에 더욱 동일시하는 악순환의 굴레가 완성된다. 그리고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고리가 순환되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
니나의 완벽에 대한 강박이 이렇게 심화되기 전 영화 초반에는 이 순환에 박차를 가하는 요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끔찍한 것-이자 이 영화를 보기 힘들었던 두 번째 원인-이 바로 단장 토마스(뱅상 카셀)이다. 발레단 단장 토마스는 기회를 달라고 찾아온 니나에게 강제로 키스했다가 니나가 입술을 깨물고 도망치자 ‘입술을 깨물어버리다니 이게 바로 흑조의 자질이지’하며 니나를 주연으로 발탁해버린다. 그걸 시작으로 토마스는 니나에게서 흑조의 치명적인 ‘관능미’를 끌어낸답시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요구하는데, 또 ‘백조의 호수’에 점점 심각하게 빠져들고 있는 니나에게는 그런 토마스가 왕자 포지션이라 화를 내기는커녕 다른 누군가(극 중 흑조/발레단의 다른 솔리스트)에게 그를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한다. 사실 니나로서는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극 중 백조에 이입하고 있는 셈이지만, 난 보기 힘들었다. 영화가 니나의 시선을 고집하는 한 난 니나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데 니나가 불쾌해하지 않으니까 내가 더 미칠 것 같은 느낌. 어쨌든 이 영화에서 토마스의 역할은 니나가 극 중 배역에 더욱 몰입하도록, 배역과 물아일체가 되도록, 완벽에 대한 강박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니나에게 자극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완벽을 향한 니나의 광기가 걷잡아질 수 없어진 중후반부터는 분량이 확 줄어든다. 근데 그게 니나와 함께 고통받았던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가 이렇게 힘들도록 몰아세워 놓고, 정신적으로 그렇게 스트레스를 주면서 애를 압박해놓고 중간부터 쏙 빠져있는 것 같아 짜증도 나고 허탈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예술'은 무엇인가?
토마스란 인물의 재현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감독의 예술관에도 좀 의문이 생겼다. 영화 초반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 역할을 코칭하면서 계속 성적 어필을 강조한다. 그때까지야 토마스라는 인물의 예술관이 그 정도인가 생각하면서 봤다. 그런데 영화 후반, ‘완벽한’ 흑조가 되어서 무대에서 연기를 마친 니나가 토마스에게 키스했을 때 토마스는 황홀한 듯, 니나의 흑조에 매료된 듯한 반응을 보인다. 그건 영화 앞부분에서 흑조가 되어 자신을 유혹하라던 토마스의 코칭을 니나가 완벽하게 해내고 있단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결국 니나가 해낸 ‘완벽한’ 흑조는 토마스의 예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1. 니나의 완벽함은 토마스의 예술관 안에서의 완벽함일 뿐이다.
2. 니나는 스스로 환상과 현실을 합일하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완벽한 예술의 기준은 토마스의 예술관과 다르지 않다. (즉 무용수와 배역이 하나가 되어 펼친 완벽한 흑조 연기는 경이롭거나 소름이 돋기보다 성적으로 매혹적인 것에 가깝다.)
니나가 성취한 건 1이 아니라 2다. 1이었다면 영화 중반부터 토마스의 비중이 그렇게 적어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의 예술관 속에 있어야 하니까. 니나가 자신을 잃어가는 고통 속에 이룬 ‘완벽한’ 연기는 토마스뿐 아니라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흑조와 토마스의 키스, 그리고 토마스의 만족을 통해 니나의 완벽함은 토마스의 예술관이 추구하던 것과 같음이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토마스의 예술관이 <블랙스완> 세계관 내 최고? 혹은 유일의 예술관이 된 것이고, 감독의 예술관과 같은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연출이 토마스를 ‘뛰어난’ 예술가로 인정했기 때문에 결국 앞서 토마스가 흑조 연기를 가르치며 니나에게 했던 일들이 모두 ‘예술적 성취를 위해 겪어야 하는 고된 훈련’ 정도로 깔끔하게 미화돼버린다. 내가 영화를 보며 느낀 흑조-검은 깃털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빨간 눈으로 세상에 마치 그 혼자인 것 같은-연기는 전혀 그렇게(토마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이 영화가 말하는 ‘완벽한’ 예술이란 니나가 자기 자신과 백조, 흑조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며 예술과 배우가 하나 되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토마스가 뿌려지기 전까지는... 왜 중간부터 슬쩍 빠졌던 토마스를 마지막에 배치해서 니나의 광기가 만든 ‘완벽한’ 예술에 의문을 남긴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내가 영화에서 본 흑조 연기는 어차피 니나의 내면을 표현한 것일 뿐이니까 다른 인물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거나, 아니면 토마스는 애초에 늘 이런 식으로, 베스를 비롯해 다른 무용수에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완벽에 대한 강박을 유도해왔던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니나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토마스가 주입한 연기 방식이고, 그래서 마지막에 니나가 “난 완벽했어요.”라고 할 때 토마스만은 살짝 웃는 표정을 지었던 것일지도. 그 말은 즉, 니나는 예술의 완벽함을 위해 연기했지만, 토마스에게 그 ‘완벽’이란 사람만 바뀔 뿐 예술가를 몰아세우는 비슷한 방식이었을 뿐 그 예술의 경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공연의 성패가 중요한, 사업자에 가까운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뭐가 됐든, 토마스라는 인물의 재현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인지를 좀 더 명확히 드러낼 필요가 있지 않았나. 그러지 못해서인지 아님 내가 무서워서 흐린 눈 했는지는 몰라도, 이 영화에서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예술관이 토마스와 비슷할 것 같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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