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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 각자의 해피(새드)엔딩을 선택하기

by 끄적고구마 2021. 8. 3.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할까 봐 최대한 많이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지난달에 관람한 뮤지컬 후기를 미루다 미루다 이제야 쓴다.

 

기간: 2021.06.22 ~ 2021.09.05

장소: 예스24스테이지

캐스팅: 임준혁, 해나, 이선근

관람 일자: 2021.07.06

 

스포 주의

 


 

1.

뮤지컬을 예매해두고 한동안 이 제목을 어쩌다 해피엔딩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포스터가 풍기는 연분홍빛 분위기에 어쩌다 해피엔딩이란 잘못된 제목까지 더해져 무심결에 알콩달콩하고 말랑한 극을 상상하고 있었다. 어찌저찌 우당탕탕하다가 그래도 행복하게 다 잘 풀리나보다... 아주 큰 착각이었다. 우리도 어쩌면마지막까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이 마지막까지 남아 더 슬픈 이야기였다.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펑펑 우는 관객들도 볼 수 있었다.

이미 전에 <해피투게더>(왕가위)에서 제목에 해피가 들어가는 이상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놓고 왜 같은 실수를 반복했을까. 이젠 잊지 않을 것 같다. 제목에 해피행복이 들어간다? 그럼 의심부터 해야 한다.

 

2.

올리버와 클레어는 한때 누군가에게 필요했던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파트 방 한 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내는 헬퍼봇이다. 올리버의 일상은 처음엔 편안하고 산뜻해 보이지만 너무 비슷한 하루하루가 반복되면서, 그리고 이웃 클레어와 교류하며 그와의 짧은 만남이 일상이 되기 시작하면서 달리 느껴진다. 함께할 때의 설렘과 즐거움은 그 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외로움까지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들의 동행과 사랑은 달달하면서도 쓸쓸하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고 연인들이 할 법한 행동을 하면서 사랑을 학습하던 구식 헬퍼봇들.

 

3.

올리버와 클레어는 자신의 엔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식 헬퍼봇들은 이미 여기저기 고장 나고 있다. 내구성이 약한 헬퍼봇6 클레어에게는 300-500일 정도, 그보다 튼튼하게 설계된 헬퍼봇5 올리버에겐 900-1200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올리버는 망가져 가는 클레어를 보며 괴로워하고 클레어는 괴로워하는 올리버를 보며 슬퍼한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건 이별 그리고 메모리 삭제였다. 해피엔딩을 위해서는 사랑 때문에 맞이할 새드엔딩을 피해야 했다.

보통 어떤 이야기의 마지막은 해피엔딩또는 새드엔딩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계속 부품이 망가져가는 오래된 헬퍼봇들에게는 이런 이분법이 무의미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에서 끝나지 않으니까. 엔딩은 이미 정해져 있다. 클레어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고 아마 올리버는 그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럼 그 엔딩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클레어는 사랑을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라면, 혼자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생활이 외로운지 몰랐던 때라면 올리버와 클레어는 각자 죽음을 훨씬 편안하게 맞았을 것이다. 먼저 떠나거나 남겨지는 한쪽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올리버와 클레어는 사랑하면서 많이 행복했던 만큼 많이 슬퍼하기도 했다. 사랑의 기쁨마저 엔딩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줄 순 없었다.

그럼 대체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행복한 만큼 슬프다면.

 

4.

엔딩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한 올리버의 답은 클레어와 달랐다. 메모리를 삭제한 클레어와 달리 올리버는 두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혼자 소중히 간직하기로 한 것이다. 클레어에게 아무것도 말할 수도 티를 낼 수도 없는 올리버는 혼자 많이 고통스러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올리버가 바라는 해피엔딩은 모든 걸 잊고 편안한 혼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슬픈 만큼 행복했던 감정들을 품고 기억하는 것에 더 가까웠을 테니, 부디 그 행복이 올리버에게 충분히 값지기를 바랄 뿐.

 

 


+)

무대도, 캐릭터 연기도 좋았다. 올리버와 클레어의 움직임이 정말 좋았다. 특히 클레어가 팔을 툭 떨어뜨리는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배우님 세 분 다 목소리도 감미로웠는데, 개인적으로 올리버와 클레어의 목소리 합이 맞는 조합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함께 부를 때보다 따로 부를 때가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