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 기간: 2021.05.01.(토) ~ 2021.08.29.(일)
- 시간: 10:00 ~ 19:00
-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 작가: 파블로 피카소
- 관람일자: 2021.06.23.
전시구성
- 바르셀로나에서 파리, 혁명의 시대
- 질서로의 회복,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 볼라르 연작
- 새로운 도전, 도자기 작업
- 피카소와 여인
- 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
- 마지막 열정
파블로 피카소(1881-1973): 프랑스에서 활동한 스페인 출신 화가.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의 발견은 오디오 가이드 앱 ‘가이드온’이었다. 전날 잠들기 전에 오디오 가이드를 구매해서 다운 받아놨는데 편하고 전시 이후에도(전시 기간 동안)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이 전시 리뷰도 오디오 가이드를 참고해 작성함. (이하 직접인용 출처는 모두 오디오 가이드)
<사분의 삼 등이 보이는 여인의 누드>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하기까지 준비 작업한 백 점이 넘는 습작 중 하나라고 한다. 왠지 천재적인 예술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고유하고 완결적이고 일회적이어서 그걸 만든 과정도 그럴 것 같다는 막연한 환상이 있는데, 사실은 그걸 그리기 전에 수많은 연습과 다른 작품들이 있었다는 게 좀 위로나 응원처럼 느껴졌다. 어느 작가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비슷한 수십 점의 그림들이나 ‘무제’라고 되어 있는 작품들이 떠올랐다.
누드화 정말 안 좋아하는데, 이 그림은 사실 제목 보기 전에 누드화를 의도한 건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흑인의 누드화를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달리스크처럼 성적 판타지로 소비된 경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오달리스크나 유색 인종을 그리더라도 ‘매력적으로’ 묘사할 때는 피부가 더 하얗게 칠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누드화’라는 제목에는 잘 사용되지 않을 법한 이 그림의 색감이 인상 깊게 남았다.
<얼굴과 프로필>

1920년대 이후에 정면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던 피카소는 구체적인 얼굴 특징이 제거된 측면의 그림자 형상으로 자신을 상징하였습니다. 화가의 옆모습과 괴물 같은 형상이 공존하는 이유는 올가와의 불화에서 기인된 피카소의 심리적 갈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은 창이 있는 실내공간과 세 얼굴의 옆모습이 절묘하게 겹쳐진 게 마음에 들었다. 왼쪽 얼굴은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 또는 그 바람에 휘날리는 주름진 커튼 같고, 오른쪽 얼굴은 벽에 붙은 그림과 겹쳐져 눈이 있는 얼굴이 된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흰 얼굴과 그림의 눈이 서로를 관통하는 저 표현이 좋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는 하얀 두 얼굴은 각각 창문의 공간과 벽의 공간에 있다는 점, 그리고 둘 사이에는 희고 두꺼운 구분선(혹은 벽)이 놓여있다는 점에서 갈등과 단절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볼라르 연작
192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판화 제작을 시작한 피카소는 일생동안 2,500여점의 판화 작품을 남겼다. 하얀 종이에 아주 얇은 펜으로 그린 것 같은 느낌을 내는 작품들이었다. 마치 드로잉 노트 한 권에 낙서나 스케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섹션에서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싸우거나 쓰러진 미노타우로스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이 강박적이고 조금 공포스러울 정도로 분명하게 그려졌다는 점, 그리고 화가와 (마리 테레즈로 알려진) 모델, 그리고 다시 그들이 만드는 작품(그림 또는 조각)의 신화적 인물들이 마구 섞여 있다는 점이었다.
<<볼라르 연작>>은 1930년에서 1937년까지 100권으로 제작된 연작으로 피카소의 판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입니다. 판화의 이름은 이 작품을 주문한 화상 아브루아즈 볼라르의 이름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볼라르 연작>>의 주제는 크게 렘브란트의 환상이 깃들어 있는 ‘조각가의 작업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볼라르 초상화 3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30년대 그림과 마리 테레즈
<시계를 찬 여인>(1936)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1937)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창문 앞에 앉아있는 여인>(1937)

내가 피카소를 잘 모르긴 해도 여성 편력으로 악명 높은 화가란 건 안다. 이번 전시는 최대한 피카소를 욕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 같지만, 올가와 결혼 생활 중 마리 테레즈와 10년 동안 몰래 만났다거나, 점점 새로운 연인과의 나이 차이가 심하게 벌어지는 걸 보면서 더 이상 피카소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졌다. 화가의 삶을 알면 알수록 피카소가 싫어질까 봐. 연인에게서 미술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피카소는 화풍의 변화와 애정 관계의 변화가 밀접했던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각 초상화에 색과 패턴을 활용하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같은 인물을 모델로 한 초상화가 각기 다른 느낌을 풍기고 있단 점이었다. 그림 속에 달라질 만한 상황 같은 건 없다. 그림의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의 감정과 분위기가 달리 표현되고 있었다. 쓸쓸함, 고독, 우울, 외로움, 여유, 초조함 – 아마 마리 테레즈의 것과 피카소가 그에게 투영한 감정들이 섞여 있겠지만 상대가 지닌 다양한 감정과 모습을 그렸단 점에서 피카소가 적어도 사랑할 때엔 상대에게 마음을 다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피카소의 연인 연혁에 겹쳐지는 기간들이 꽤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세계대전과 도라 마르
<모자 쓴 여인의 상반신>(1941)

두 번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피카소는 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작품 세계 안에 묘사했습니다. 작품의 제작 시기는 피카소가 파리의 작업실에서 나치 점령군의 감시를 받으면서 작업에 몰두했던 때입니다. 또한 이 시기는 마리 테레즈와 사이가 멀어지고 새 연인 도라 마르가 피카소의 뮤즈로 약 9년에 걸쳐 작품의 주된 모델로 등장합니다.
나는 이 그림이 마음에 든다. 어두운 배경, 어두운 옷, 무표정하고 비틀린 얼굴, 차분한 듯하지만 무언가 참고 있는지 화가 나는지 꽉 움켜쥔 손가락과 빨간 손톱. 정적인 듯 담담해 보이는 것 속에 억눌린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사진 작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는 과정을 찍은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1944)

2차 세계대전 종식에 대한 희망이 서서히 싹틀 무렵 제작되었다는 이 작품의 밝은 색상은 그런 희망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의 학살>(1951)

<게르니카>, <시체구덩이>와 더불어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 중 하나.
화면은 좌우를 분할하여 오른쪽은 학살자 그룹으로 왼쪽에는 피해자 그룹으로 이분법적 경계를 나누었습니다. 이 특정 구도는 피카소가 평소 존경하던 스페인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 프란시스코 고야와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쟁을 그린 그림이 처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길래 좀 의아했다. 물론 전쟁의 풍경 중 일방적인 학살과 처형의 장면도 빠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현실과 무관한 느낌이었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했다면서 정작 그 실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원론적으로 반전 메시지를 그린 것 같단 느낌. 한쪽은 무리도 들지 못한 여성과 어린아이들, 다른 한쪽은 총과 칼, 갑옷 등으로 무장한 남성들이다. 전자의 인물들은 둥근 선으로 표현되었고, 후자의 인물들은 각진 선으로 그려졌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의 학살>은 국내외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제목에 ‘한국’이라는 단어를 달고도 괜히 70년 동안 한국에 들여올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고, <한국에서의 학살>은 6.25전쟁에 미국 개입을 반대했던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피카소가 그린 이 작품에서 맨손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오른쪽 군인들은 피카소가 놓인 현실정치를 고려하면 미군을 묘사한 셈이다. 이 같은 정황 때문인지 <한국에서의 학살>을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리 학살 사건을 그린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았던 듯한데, 점점 신천리 학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우세해진 것 같다. - 참조: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빨갱이 그림’ 오해는 그만 : 음악·공연·전시 : 문화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해당 전시에서도 그림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사건을 묘사하지 않고 모호하고 추상적인 인물들을 그림으로써 보편적인 반전 반폭력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설명하는 쪽을 택했다. 게다가 좀 더 알아보니 신천리 학살 자체도 처음에는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로 알려졌다가 최근(?)에는 사상 대립으로 벌어진 비극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논쟁적인 사건이었다. 현재로서는 이 작품이 한국전쟁 중 특정 사건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듯하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발표했을 때 미국에서는 피카소를 반미선전 작가로 지목해 입국을 금지했고,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에서는 학살 주체가 모호하게 표현되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고 한다. 전위적이고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던 피카소에게는 <한국에서의 대학살>에서 보여준 정도의 선명한 이분법과 인간 형태를 한 표상들이 노동자를 위한 사실주의 미학을 추구했던 공산당에게 제시한 나름의 타협책이었겠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 참조: ‘6·25 참상’ 묘사 피카소 그림, 자유·공산 진영 모두 불평 - 중앙일보 (joins.com)
<보브나르그의 식탁>(1960)

노년기의 작품. 상당히 큰 그림이라 흘러내린 물감과 덧칠한 자국이 잘 보였다. 이전까지의 작품도 이렇게 많은 덧칠로 완성된 것인지, 이 작품에서만 흘러내리는 작품과 완벽히 덮이지 않은 덧칠 자국을 그대로 남기기로 한 것인지, 정제되지 않은 느낌을 내려고 한 것인지, 지금까지와 다른 묘한 구석들을 보며 의도한 허술함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전시실을 나오면서 피카소가 분명 이 작품은 마음에 안 들어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서 예전만큼 섬세하게 못 그린 것 같다고. 달마시안 머리도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워버린 것 같다면서.
피카소는 라파엘처럼 그리기 위해 사 년이 걸렸고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평생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 노년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의 붓질이 의도된 것이든 노화로 인한 실수든 –사람은 늙으면서 다시 아이가 된다는 말처럼-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어린아이‘처럼’ 그린 그림에 가까워 보이긴 한다. 내가 이 그림에서 오래 보았던 건 오른쪽 인물의 옆 얼굴이, 흰색이 칠해지기 전엔 그냥 동그라미였다는 것.
+)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전시에서는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과 조각품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피카소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재능을 질투했다는 말을 듣고, 자코메티는 조각, 피카소는 회화, 분야가 다르지 않나? 생각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피카소도 조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피카소의 조각은 자코메티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는지 재료나 기법 같은 게 많이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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