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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시

뮤지컬 <엑스칼리버> 후기

by 끄적고구마 2021. 10. 15.

뮤지컬 <엑스칼리버>

2021.10.15. 14:00 공연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캐스팅: 도겸, 이지훈, 신영숙, 손준호, 이봄소리, 이상준, 홍경수

 

 

 

1.

최근 세븐틴에 입덕했다가 도겸님이 출연 중인 뮤지컬을 보러 왔다. 원래 뮤지컬 관객이 젊은 여성이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내 또래 여자들이 가장 압도적으로 많아 보였다. 게다가 공연 시작 전에 도겸 플랑 앞에서 사진 찍으려고 줄 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돌 티켓 파워를 노리는 뮤지컬이라고는 생각했지만(그리고 나도 그 아이돌 덕질하다가 온 것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팬덤 정모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방구석 덕질할 때는 못 느껴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

도겸님 보러 왔다가 신영숙님, 이봄소리님, 손준호님께 감탄하고 간다. 발음 하나 하나, 음정 한음 한음이 되게 탄탄하고 울림이 느껴졌다. 도겸님 목소리 되게 좋아하고 연기도 노래도 잘하셨는데, 그래도 오래 뮤지컬로 내공을 쌓아온 배우님들과는 좀 차이가 났다. 도겸님도 그냥 노래 들을 때 귀에 박힐 정도로 성량도 풍부하고 딕션도 좋은 가수인데 좀 울림이 다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도겸님 울림이 좀 높고 섬세하다면 다른 배우님들은 낮고 두꺼운 울림통을 쓰시는 느낌. 이게 흔히 말하는 대중가요와 뮤지컬의 차이인가?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역시 그 큰 극장을 목소리로 채우면서 내용도 전달하는 건 진짜 엄청난 일인 것이다. 새삼 뮤지컬 배우의 위대함을 느꼈다.

 

3.

무대 첫인상은 촌스러운 폰트. “가장 야만스런 왕 우더 펜드라곤이 참혹한 전쟁을 일으키고,”를 비롯한 문장이... 그냥 진짜 사소하긴 하지만 극장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데 좀 더 멋진 폰트에 정제된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됐던 걸까. ‘야만스런이나 찢겨진말고 야만스러운’, ‘찢긴으로 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극이 시작하고는 더 이상 볼 일 없었던, 사소한 점이긴 하다.

기억에 남는 건 무대 앞에 투명한 스크린(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다.)이었다. 극 시작 전부터 계속 검은 비나 물결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나길래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극중 멀린이나 모르가나가 마법을 쓸 때 그 힘을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됐는데, 그 방식이 판타지 장르랑 잘 어울렸다.

그 밖에는 - 수도원 외벽에 조명만으로 실내 공간을 표현한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나, 왠지 위키드가 생각나던 투박한 프로시니엄 아치에 불빛이 들어오면서 막이 올라가던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스포주의)

 

4.

서사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서사도 넘버도 나름 준수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개가 급하게 느껴지긴 했는데 그 정도는 흔하니까..) 예습 겸 유튜브에서 초연 당시 넘버를 몇 곡 듣고 갔는데 노래 앞뒤로 나오는 대사들이 바뀌어있었다. 재연 때 좀 더 서사를 매끄럽게 보여주려고 대사를 다듬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면 순서 등 다른 수정이 없었다고 가정했을 때 오늘 본 공연에서 초연 때 대사들이 들어갔다면 확실히 많이 부자연스러웠을 것 같다.

원탁의 기사는 워낙 유명하지만 생각해보니 자세히 아는 게 없어서 인터미션 때 간단히 검색을 해봤는데, 책으로 21권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앞으로도) 모를 척할 만한 분량이다. 그리고 바위산에 꽂힌 검을 뽑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는 동화 속 영웅 같은 이미지에 비해 실제로는 굉장히 구구절절하고 인간적인 치정(?) 이야기인가 보다.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불륜 이야기도 있다길래 뮤지컬에서는 그냥 랜슬롯의 짝사랑 정도만 보여주려나 생각했는데 가감없이 아더에게 무자비한 서사로 흘러가서...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다 가진 미화된 권력자보다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왕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노력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게 더 좋다.

아쉬웠던 점은 모르가나나 멀린이 그 존재감에 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 특히 모르가나는 주술을 부리는 것 같은 장면을 반복하면서 저주를 내리는 마녀 같은 포지션을 만들어가는데 그냥 극이 암울하게 흘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인물로만 나타난다는 느낌이 강했다. 모르가나의 행동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

 

5.

도겸님이 방황하는 소년 같은 아더 캐릭터를 잘 표현한다는 후기들은 다 사실이었다. 이 극에서 아더는 고집은 있지만 여리고 상처받으면서 홀로 서는 인물인데, 초반의 해맑고 귀여운 성정이 드러나는 장면부터 후반부 감정적이고 부서질 것 같지만 무너지지는 않는 모습까지 호소력 있게 잘 표현되었다고 느꼈다. 다 용서했다며 기네비어를 붙잡으면서 울먹이는 것도 사실 이전 입장과 달라지는 장면이라 아더 감정에 몰입하지 못하면 어색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냥 그 절박함과 외로움이 너무 잘 느껴졌다.

가장 존재감이 강한 캐릭터는 모르가나였다. 신영숙 배우님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 또 뵙고 싶다. 카리스마 있고 멋지다. 모르가나에 홀려서 중간쯤엔 그냥 주인공이 모르가나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진짜 진지하게 모르가나가 주인공이어도 멋진 서사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네비어는 전사 캐릭터인데, 아더와 러브라인이 잡히면서 (랜슬롯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 본인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전사로 여기지만) 전사로서의 존재감이 급격히 떨어졌다. 고대 여신들이 격하되면서 누군가의 배필이 되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결국 아더를 떠나면서 기네비어는 다시 전사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 이후로도 전사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기네비어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고 계속 왕비 자리에 있었다면 결국 전쟁터에는 못 나오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아더의 출생. 다른 나라 왕비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우더 펜드라곤의 모습을 바꿔주는 대가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멀린이 갖는다? 진짜 웃기는 사람들이다. 왕비는 대체 무슨 죄람... 애도 왕비가 낳았을 텐데 멀린이 대체 뭐라고 하고 데려갔으려나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