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하 지음, 송경아 번역, 『호랑이가 눈뜰 때』, 창비, 2023
최근 한국계 외국 작가들이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들이 눈에 띄는 것 같다. 그 중 이 책을 처음 읽어봤는데, 익숙한 소재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엮여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초반부는 생각보다 잘 안 읽혔다. 낯선 세계관과 호랑이령의 독특한 감각이 섞인 서술, 번역체 문장 때문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해리포터 초반부를 읽을 때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본집의 1/3을 넘길 때부터는 나 같은 도파민 중독자도 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빠져들어 읽게 되었다.
영웅서사에서 주인공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주황 세빈'은 열세살의 가장 어린 호랑이로서 그걸 해낸다. 가장 어린 생도들이 배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이야기. 청소년기에 해리포터와 타라덩컨을 좋아했던 내가 마다할 리 없는 이야기였다.
세빈은 어른 '포식자'의 권위와 위협에 순응하지 않는다. 기존의 두 정의가 충돌할 때 선택의 순간에서, 가기 쉬운 길과 믿기 쉬운 가치 대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믿고 행동한다. 눈앞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위험으로 걸어가는 것보다, 휩쓸리는 척 못 이기는 척 눈을 감고 뒤늦게 후회와 자기연민 또는 합리화에 빠지는 게 쉬울 때가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세빈의 선택이 내게도 용기가 되었다. 난 아직 세빈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언젠가 내가 용기를 내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이런 주인공들이 주는 작은 용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선택일 것이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새로운 영웅의 구도를 취하는 게 주인공뿐 아니라 소설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창작물이 '기존 질서'를 '아버지'로 대변했다면, 주황 호랑이족의 질서는 가모장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젠더를 드러내는 명찰을 차고 다니고(그/그녀/그이), 백인중심체계에서는 늘 변두리의 문자로 취급되는 한글이 공용어인 세계이다.
가끔 서사의 구조와 관계없이 세계관 자체에서 (판타지임에도) 낡음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은 현대와 미래의 청소년을 위한 판타지가 되어줄 수 있을 듯하다.
이 글은 창비 소설Y클럽 활동으로 대본집(가제본)을 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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