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2019)
장르: 코미디, 재난, 액션
감독: 이상근
주연: 조정석(이용남 역), 윤아(정의주 역)
길을 감춰버리는 안개 같은 유독가스. 그 가스로 뒤덮인 도시에서 가족들을 먼저 대피시키며 용남은 이렇게 외친다.
"금방 따라갈게!"
성대한 칠순 잔치를 치르는 부모님, 잘 나가는 사촌, 승진이 빠른 처형, 아직 어린 사촌 동생들. 그 사이에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용남은 누나의 말대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처지다. 그러니까 용남의 상황을 고려하면, 금방 따라가겠다는 그의 말은 지금은 보잘것없고 남들보다 뒤처진 처지지만 곧 그들과 함께 어울려도 부끄럽지 않은 사회인이 되겠다는 취업준비생의 절박한 외침으로도 들리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 <엑시트>에서 용남과 의주의 재난 탈출기는 2030 청년들의 사회적 생존기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높이 올라가야 생존할 수 있는 도시
용남과 의주는 유독가스로 메워진 도시에 고립되어 있다. 가스는 바닥에서 점점 위로 올라오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만 한다. ‘높은 곳에 오른다’는 말은 흔히 사회적 성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이다. 즉 유독가스가 퍼지는 도시 속에서 살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하는 상황은 더 많은 성과를 요구받는 생존경쟁에 놓인 청년세대가 느끼는 압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눈에 띄는 사람부터 구조한다는 거잖아.”
고립된 도시에서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헬기다. 그런데 헬기는 모든 사람을 구조할 만큼 넉넉하지 않다. 구조에 우선순위가 생긴다. 헬기는 닥치는 대로 아무나 구하지 않는다. 구름정원 옥상에 있는 용남과 의주를 발견하고도 그들 대신 고층 빌딩 위 수십 명의 사람에게로 향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헬기는 기준에 따라 요구조자에 순위를 매기고 구조 순서를 조정한다. 저층빌딩에 있는 사람은 고층빌딩에 있는 사람보다 더 구조되기 어려울뿐더러 독가스의 위협에도 더 많이 노출된다. 각기 다른 높이의 건물 위에서 자신을 발견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과 하늘에서 케이블을 내려 구조할 이들을 선택하는 헬기의 풍경은 구직시장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면서 마네킹과 등신대 모형으로 스무 명이 함께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주인공들처럼, 구직자들은 더 많은 스펙을 쌓고 기업이 원할 만한 말을 꾸며내기도 하며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선택받기를 기다린다.
재난을 극복하는 연결,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
따라서 이 재난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과제는 무엇보다 ‘오르는 것’(climbing)이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생존을 오로지 이들의 초인적 능력에만 기대지 않는다. 용남과 의주는 타워크레인 위에서 구조될 때까지 여러 도구를 이용하는데, 용남과 의주의 여정을 클라이밍에 빗댄다면 그들에게 길을 알려준 그 도구들은 그들의 등반을 돕는 보조물(aid)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움, 지원’이라는 뜻의 aid는 인공 암벽 등반에서 인공적 보조물을 일컫는 용어다. 재난 속에서 위기를 맞은 주인공들에게도 이런 ‘도움’이 있었다. 그건 첫째로 연결, 둘째로 사회적 안전망이다.
인물들은 재난 속에서 함께 연결되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용남과 의주의 카라비너다. 카라비너는 고정된 지점에 로프를 연결할 때 사용하는 금속고리다. 영화 초반 그들의 카라비너는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각자의 옷장 속에 있었다. 그러나 재난이 발생하자 용남과 의주는 카라비너를 이용해 함께 서로의 등반을 돕기 시작하고, 영화 후반부 타워크레인을 향해 달리는 두 사람은 고정된 지형지물 대신 서로에게 줄을 연결한다. 이 장면은 사람들이 맺는 관계와 서로 주고받는 도움이 시련을 극복할 힘이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보습학원 건물에 갇혀있던 학생들이 용남과 의주에게 도움을 받았듯이, 그리고 얼굴도 등장하지 않는 드론 주인이 주인공들만으로는 닿을 수 없던 타워크레인 건물에 로프를 연결해주듯이.
이에 더해, 주인공들이 무사히 생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그건 바로 가스 방독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도블록, 공사장 안전그물 같은 사회적 안전장치였다. 용남과 의주는 죽을힘을 다해 타워크레인으로 향했지만 결국 로프와 함께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실패 뒤에 주인공들은 살아서 구조헬기에 발견된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주인공들의 생존이 공사장 안전그물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공을 위해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청년들의 삶에서 추락하는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사장 안전그물은 무엇일까? 공사장 안전망의 이미지는 사회적 위험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 즉 ‘사회적 안전망’을 연상시킨다.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늘 성공할 수는 없다. 용남과 의주 같은 청년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실패해도 재기할 기회가 있는, 안전망을 갖춘 사회뿐이다.
기백은 용남에게 앞날이 깜깜한 자신들의 상황이 ‘재난 그 자체’라고 말한다. 재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용남은 재난을 ‘해결’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주인공이었다. 용남과 의주가 처한 현실이 사회적 재난이기 때문에, 영화 <엑시트>는 그들의 생존도 문제의 해결도 사회적으로 답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독가스 속에 고립된 주인공들은 드론과 인터넷을 통해 안전한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사회가 보장한 기회와 안전 장비들을 통해 다시 길을 찾는다. 이런 사회적 연결과 제도가 없었다면, 용남과 의주의 탈출은 결국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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