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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섯 번째 흉추> - 불확정, 미지, 생명, 공포

by 끄적고구마 2023. 8. 8.

 

2023.08.04. 에무시네마 별빛 영화제


2002년 겨울의 어느 날, 한 연인이 이사를 하며 방에 들여둔 매트리스.
매트리스에는 연인의 시간이 쌓이고 먼지와 음식물과 더러운 것들도 쌓이고 그러다 곰팡이가 피어난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인이 헤어진다. 여자가 저주처럼 읊조리는 '죽어'라는 말을, 매트리스 곰팡이 속에서 태어난 '무언가'가 배운다.

그 '무언가'는 "죽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인간의 척추뼈를 뽑아 자신의 몸에 넣는다.
흉측하고 위험하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 '무언가'는 이렇게 공포물의 괴물처럼 나타난다.

다만 여타 공포물과 다른 점은, 이 영화는 '괴물'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 '괴물'의 삶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아무도 '무언가'를 반기지는 않지만, 매트리스는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는 매트리스에 기생하여 여러 사람들의 척추뼈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것은 점차 인간의 형상으로 자라나고, 새로운 말도 배운다. 짧고 쉬운 저주와 증오의 말뿐 아니라 길고 어려운 애정과 축원의 말도 결국에는 배우게 된다.
자신의 확장적 생존을 위해 인간을 해치던 그것은 꼭 "죽어"의 괴물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별빛영화제가 끝나고 진행된 GV에서 박세영 감독은 자취방 영화 포스터 아래서 입체적으로 자라난 곰팡이를 보고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잊고 있던 그 존재를 다시 봤을 때 징그러움과 함께 애잔함을 느꼈다며.

'무언가'는 처음에는 붉은 촉수로, 나중에는 인간의 팔로, 그 뒤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탄생의 모습에 머물지 않고 남의 영역을 빼앗아 자신의 형체를 확장하는 삶의 방식이 곰팡이와 닮았다.
그러나 그건 꼭 곰팡이만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남의 몸을 먹지 않나.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나는 우리 부모님의 척추뼈를 먹고 자랐다.) 흔히 먹이사슬 최상층에 위치했다는 인간을 먹는 것은 균류다.

그러니까 이 '무언가'는 생존하려는 의지를 가진 생물이란 점에서 영화를 보는 인간과도 비슷한데, 그럼에도 그것이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무언가'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포는 미지와 불확정성에서 온다. 정체를 알 수 없고 무엇이 될지 정해지지 않은 생명의 가능성 앞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무서운 것은 늘 의지를 가진 것이다. 총만 있으면 무섭지 않다. 그 총을 쥔 사람의 의지와 행동이 두려운 것이다.
공포물의 괴수도, 귀신도, 귀신들린 물건도, 살인마도 모두 의지를 가졌고 그래서 악의를 가질 수 있기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생물은 늘 어느 정도의 미지와 불확정성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특히 나와 다른 외형을 하고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몰이해의 대상일 때 그 공포감은 극도로 커진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
인간의 몸이라고는 척추뼈를 꺼낼 때만 닿던 '무언가'가 인간의 손을 잡게 되었을 때. 그래서 결국 다섯 번째 흉추는 손에 넣지 못했을 때. '무언가'는 남을 해치는 생존법과는 다른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아주 먼 미래에는 다정한 문장을 말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악의는 미완성에 그친다. 다섯 번째 흉추가 없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