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악시 오,『바다에 빠진 소녀』- 운명을 앞지르는 인간

by 끄적고구마 2023. 7. 18.

바다에 빠진 소녀, 악시오 씀, 김경미 옮김, 이봄

어쩐지 한국계 외국인 작가들의 소설이 자주 눈에 띈다. 영화 엘리멘탈도 디아스포라 텍스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콘텐츠계에 디아스포라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다. 엄밀히 말해 이 책은 그런 주제는 아니지만, 텍스트 외적으로 넓게 보면 말이다. 아니, 신들의 세계에 이주한 인간의 이야기니 그런 주제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겠다.
디즈니는 주인공을 백인으로만 표현하길 거부한다. 시장의 논리는 경계를 넓히는 쪽으로 움직인다. 언젠가 세계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세계정부 같은 시스템이 된다면, 지금의 다문화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세계인'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로컬색이 짙을수록 주변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러나 아직은 이주민들이, 아시아계 미국인이 경계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그들이 경계인으로서 겪는, 그리하여 결국 변화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지금 경계 안 이야기에 질린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로판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딱이다.
책을 읽는 동안 한국풍 로판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만화든 영화든 영상화되면 정말 예쁠 것 같다.
한국계 미국인이 쓴 소설로, 배경이나 소재는 익숙한데 등장인물 이름들이나 대사, 소통 방식 등이 디즈니나 마블 같은 미국식 콘텐츠를 연상시켜서 재미있었다. 마치 김치전이라고 해서 먹었는데 버터향이 풍기는 느낌. 어쨌든 맛있었다.
영어덜트 문학이라서 쉽게 읽히고 주제도 현대적이고 로맨스도 쏠쏠해서 책 안 읽는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상화되면 인기 많을 것 같은데, 누가 안 데려가나 모르겠다.)

이 이야기가 운명을 다루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내게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 내 의지와 다른 것, 비가역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란 인상이 있다. 모든 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의지가 타오르는 오이디푸스나 패왕별희 같은 작품에서 운명은 가장 큰 장애물이자 비극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인간다운 의지를 꺾지 않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앞질러 간다.

운명을 쫓지 마, 미나.
운명이 널 쫓게 해야지.


미나의 운명의 붉은 실은 끊어지고 새로이 생기고 또 사라진다.
선택과 행동에 따라 운명은 흔들린다.
적어도 운명의 수면은 요동친다. 수면이 요동쳐야 파도가 되고 폭풍이 일 테니.
인간의 삶에서 운명이란 차라리 이처럼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마음껏 흔들어보면 되겠지.